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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돌봄 국가를 원한다

  • 입력 2022.12.15 10:21      조회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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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우리는 돌봄 국가를 원한다-윤자영.pdf

 

윤자영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했고, 이후 충남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노동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주제는 돌봄과 젠더, 사회서비스와 여성 노동시장 등이다.

 

1. 들어가며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감소, 기술혁명과 같은 이 모든 변화는 우리 사회의 돌봄 위기가 심화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돌봄이 필수불가결하다. 코로나 팬데믹은 가족과 시장이 해결하던 돌봄이 많은 구멍과 문제를 안고 있는 시스템 속에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상당한 재정을 투입해 국가가 추진해온 돌봄의 사회화는 민간 위탁 기관의 영리 추구로 전락했다. 수가를 바탕으로 한 이용자 선택권 중심의 돌봄 제공은 수많은 돌봄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정당한 보상을 보장하지 못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충분하고 안정적으로 돌봄을 제공받지 못하고, 돌봄을 둘러싼 가족 내 갈등은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인간을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되게 만들고 있다. 2021년 현재 0.81이라는 역사상 최저 출산율, 자살과 간병 살인, 아동 방임과 학대 등은 우리 사회가 가진 돌봄의 자원과 역량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더욱 가시화된 돌봄 위기는 돌봄에 대한 재정 투자를 통해 사회의 재건과 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로 모아지기도 했다.
    돌봄노동은 가족, 공동체, 시장, 국가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는 ‘돌봄 경제’ 안에서 수행된다.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여 제공하는 보육과 요양 등 사회적 돌봄만으로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행복과 번영을 보장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가 확장되고 복지국가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가족의 돌봄노동 제공 역할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돌봄노동의 주된 수행자는 여성이라는 성별 고정관념은 여전히 공고하며 시장노동 중심의 정부 정책과 사회안전망 구축은 돌봄노동을 사회화의 대상으로만 간주해 왔다. 소득의 손실이나 노후 빈곤이라는 형태로 개인이 떠안은 돌봄노동 수행의 경제적 불이익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인 돌봄 제공을 감소시킨 주된 원인이었다. 생존과 사회재생산을 위해 모두에게 필요한 돌봄노동은 결국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인 여성이나 이주 노동자가 무보수나 저임금으로 수행하는 그림자 노동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돌봄의 위기는 남녀 간 돌봄노동의 불평등한 분배 위에 성장한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그리고 불평등한 분배를 교정하는 데 실패한 현대 복지국가의 책임이 크다. 이제 돌봄의 의무를 공유하고 돌봄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시장, 국가 영역에서 돌봄을 조화롭게 연결하고 북돋을 수 있는 돌봄국가를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 


2. 돌봄의 위기  
 
    돌봄의 위기는 오랜 사회경제 발전의 산물이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역사적 국면에서 나타난 돌봄의 위기가 성별과 세대의 권력 관계 변화 속에서 돌봄의 공공재적 특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Folbre, 1994). 돌봄노동은 재정적 외부성을 갖는 공공재적인 성격의 서비스를 생산한다. 공공재란 노동의 편익이 그 서비스를 받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두루두루 미치는 편익을 발생시키는 재화와 서비스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인지적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한 학습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고용주는 자본과 결합하여 생산에 투입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부모의 돌봄노동은 부모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효용 증대만을 위한 ‘투자’에 그치지 않고 전체 국민경제로 그 편익이 공유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확대와 시장 실패에 대응한 복지국가 구축으로 부모가 돌봄노동을 수행할 경제적 인센티브는 약화되었다. 임금노동자가 된 자녀는 부모의 복지가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에 복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복지국가에서는 부모는 자녀를 키우기 위해 의식주와 교육에 돈을 지출하지만, 자녀가 부모를 노후에 부양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연금제도 등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한 현대 복지국가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키운 비용을 담당하고 그 자녀로부터 편익을 온전히 거두어들이는 구조가 와해되었다. 즉 부모가 개인적으로 돈을 들이고 노력을 기울여 키운 자녀, 즉 미래의 노동력으로부터 부모뿐만 아니라 돌봄노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도 연금과 사회안전망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임금노동자로서의 경제적 기여는 노후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지만 돌봄노동 수행은 오히려 연금과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했다. 노동시장 참여와 기여를 바탕으로 사회보장제도에 편입되면 실업급여, 연금,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등 소득 보장과 돌봄 안전망은 임금 노동을 수행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보장 재정을 꾸준히 지탱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이며, 돌봄노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돌봄노동을 한 사람들에 무임승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돌봄노동의 비용을 개인이 감수한다는 것은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와 협상력이라는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돌봄노동을 주로 여성이 담당해 왔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 낮은 고용률과 빈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설명한다. 돌봄노동의 일차적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는 사회적 규범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 여성이 가정에서 훈련 없이 하는 쉬운 일이라는 문화적 편견은 돌봄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직업 위신을 가로막는다. 
    공공재적 성격의 재화와 서비스는 일반적인 경쟁 시장의 원리로는 우리 사회가 필요한 양의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돌봄의 위기, 즉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돌봄이 제공되지 못하는 것은 돌봄노동의 이러한 공공재적 특성 탓이 크다. 낸시 폴브레는 돌봄노동이 재정적 외부성을 창출하는 공공재라고 보았다. 돌봄노동의 책임과 노력이 창출하는 편익을 제대로 측정하여 돌봄노동 수행자에게 온전히 보상할 수 없고,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편익을 누리는 무임승차자가 증가하면, 누구도 돌보는 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돌보미, 노인생활지원사,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보육교사 등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돌봄 노동자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측정하고 온전히 보상받지 못하면 일자리에 남아 있지 않으려 할 것이며 양질의 돌봄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그 결과 가정 안팎에서 양질의 서비스를 생산하는 돌봄노동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과소 공급된다. 
    돌봄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중의적인 함축을 지닌다. 돌봄노동은 여성에게 강제되어 왔으며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으로서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노동으로 간주된다. 돌봄노동에서 해방되어 시장노동에 참여하는 것은 성평등의 수단이나 궁극적 목표로 여겨졌다. 따라서 후기 산업사회 복지국가는 돌봄노동을 사회화하여 여성이 시장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돌봄노동을 강제나 의무 때문에 수행할 여지는 많이 감소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포함한 사회와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하여 이타심과 호혜를 바탕으로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노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돌봄과 협동의 욕망을 보듬기보다는 시장노동 중심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돌봄노동 수행의 불이익을 방치했다. 한정적인 시간 자원을 가진 개인에게 시장으로의 통합을 통한 자립의 책임을 강제할 때 돌봄을 위한 자원은 소진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돌봄노동의 윤리적·경제적 가치는 하락하고 노동력 재생산과 돌봄의 위기는 가속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돌봄의 문제는 복지와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다루어졌다. 저출산 고령화가 야기할 노동력 감소로 여성의 인적 자본과 노동력화가 경제성장을 위한 잠재력 확보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사회서비스 정책은 돌봄 문제에 대한 공적 대응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1997년 이후 경제 발전론자의 노동시장 활성화 전략과 여성계의 성평등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Peng, 2009). 
    돌봄의 사회화는 국가가 재정만 지원하고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한 시장화를 추구했다. 노인, 아동,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나 지역사회의 약자들을 돌보는 돌봄노동자의 처우는 굉장히 열악하여 최저임금에 가까운 호출형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다. 정부가 정한 돌봄서비스의 수가는 돌봄노동자의 경력과 대상자 특성에 무관하게 결정되며, 서비스 공급이 이용자의 수요에 의존하고 있어 고용 관계와 소득이 불안정하다. 노동관계법과 정책은 돌봄노동의 대인서비스라는 특수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여, 전통적으로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하던 제조업과 사무직 노동자에 맞춰져 있는 노동 과정에 적용된 근로기준과 사회보호가 돌봄노동에 적용되는 데 한계가 있다. 
    돌봄의 사회화는 가정, 사회, 지역, 시장을 연결하여 돌봄노동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재생산 체계를 고민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가족이 사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돌봄노동은 여성이 시장노동에 포섭되지 않는 한 여전히 개별 가족과 여성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돌봄노동을 회피하고 있는데, 돌봄노동을 회피하는 근본적인 원인과 돌봄노동 가치의 저평가에 대한 성찰 없이 돌봄노동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돌봄노동을 상품화하는 데 급급해하여 왔다. 최소한의 예산으로 많은 수혜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효율적인 재정 운용을 추구하느라 돌봄노동자를 언제 무노동 무임금 상태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지위에 방치하고 있다. 돌봄을 받을 권리를 우선한다는 미명하에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을 경시해왔다. 
    돌봄의 수요가 증가하면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가정에서 무급으로 제공하던 돌봄 제공자들의 시장노동 기회가 증가하면서 무급 돌봄노동 공급이 감소할 때 사회가 직면하는 돌봄 비용은 증가한다. 돌봄 비용이 증가하면 정작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동과 노약자들은 돌봄을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돌봄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은 것은 이러한 돌봄 비용의 상승이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의 고비용 문제는 돌봄 구매자가 서비스 이용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거나 돌봄 노동자가 낮은 임금을 감수함으로써 해결되어 왔다. 돌봄서비스의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경력과 숙련 수준이 낮은 노동자를 채용하여 비용 상승을 막기도 했다. 대부분의 돌봄 수혜자들은 경제적으로 취약하여 지불 능력이 부족하다. 결국, 국가의 보조금 없이는 지속가능한 돌봄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이 불가능하다.
    성장 중심적인 경제 체제는 돌봄의 위기를 진전시켰다. 다른 경제 행위보다 물질생산에 모든 자원의 투입을 우선시하는 위계적 경제 패러다임과 집단 간 불평등은 돌봄을 위한 자원의 확보와 평등한 공급을 가로막음으로써 돌봄의 위기를 심화시켰다(Floro, 2012). 현대자본주의의 발전 전략은 자연 자원과 환경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시 즐기던 돌봄의 기회와 자원을 소진시키고 있다. 상품 생산, 풍요로움, 물질적 부의 극대화를 경제 발전의 목표로 삼으며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돌봄과 사회자본이 인간의 복지에 대해 기여하는 측면을 간과했다. 
    그러나 성장 중심 경제 체제는 돌봄의 위기마저 시장이 해결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소비자의 지불 능력과 선택에 기초해서 돌봄서비스를 아동과 노인에게 제공하는 시장 제도는 최선으로 여겨졌다. 돌봄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국경을 넘는 여성의 이주는 새로운 국제노동분업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일국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인구학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에서 들여오는 노동을 돌봄 시장에 투입하는 해결책은 단기적으로 임기응변은 될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지연시킬 뿐이다. 무엇보다 돌봄을 조직하고 공급하는 자생적인 공동체의 생성과 진화를 가로막는다(Arat-Koc, 2006). 


3. 돌봄 국가를 지향하며

    돌봄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가는 돌봄 경제와 돌봄노동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 돌봄 경제는 인간의 역량을 생산, 발전, 유지하는 영역이다. 쉽게 사고파는 상품을 생산하는 다른 경제와 매우 다른 과정에 기반한다. 돌봄 경제에 투입되는 많은 시간과 돈은 시장 밖에 있다. 자녀를 키우고,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허약한 노인을 돌보는 가족과 지역사회는 돌봄 경제의 큰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생산’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힘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이유로 ‘경제’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돌봄 경제는 가족과 지역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건강, 교육,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많은 민간과 공공 부문을 포함한다. 무급 돌봄노동과 유급 돌봄노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 부모는 교사와 협력하여 자녀를 교육하고,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와 가족 구성원과 소통하며 환자를 치료한다. 가족과 지역사회 시민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보육과 노인 돌봄 종사자도 필수 불가결하다. 
    돌봄노동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는 고도로 개인 맞춤화되어 있고 개인적인 연결을 수반하는 노동 과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측정 가능한 부가가치를 기반으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보상하기 어려울 때 돌봄노동 수행자의 내재적 동기는 특히 중요하다. 돌봄노동은 대상자의 복지에 관한 관심이 제공되는 서비스의 품질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 헌신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손’보다 더 중요하다. 국가는 가정 안팎의 돌봄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 훼손되지 않고 잘 작동하도록 돌보고 보듬고 격려해야 한다. 
    돌봄 경제는 인간의 ‘역량(capabilities)’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돌봄 경제는 본질적 가치를 지닌 인간의 역량을 생산하고 명백한 경제적 이점을 창출한다. 사람이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부이다. 국내총생산(GDP)은 단순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즉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투입물일 뿐이다. 그러나 GDP 자체를 목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중 보건 위기, 소득 불평등 심화, 자살,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으로 인한 사망, 문해력과 교육 수준 저하 등은 모두 사회적 부작용뿐만 아니라 경제적 손실이다. 유엔의 인간개발보고서는 발전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이 건강하고 창의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득과 경제성장은 수단이며 목적이 아니다. 인간개발은 개인 소득뿐만 아니라 공적 서비스, 자연 자원과 가정 안팎의 돌봄 노동에 달려 있다. 돌봄은 인간의 역량(capabilities)을 형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기능하는 중요한 면모이기 때문에 인간 발달의 핵심적 측면이다(Sakiko, 2003). 
    경제의 전반적인 생산성은 주로 협력, 혁신, 타인에 대한 배려에 의해 결정된다. 돌봄 경제에 대한 공공 투자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의료, 교육, 보육, 요양에 대한 접근성 향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개선하여 성별, 세대, 계층 간의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위한 가정과 지역사회 기반 돌봄 투자는 가정 내의 시장노동과 돌봄노동 간의 긴장을 줄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돌봄 패키지를 설계할 수 있는 권리와 유연성을 제공할 수 있다. 돌봄 노동을 사회경제적으로 인정하고 이 가치 있는 일에 모두의 시간을 나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돌봄 경제를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일·가정 양립 정책을 넘어서는 경제 전반의 돌봄노동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전략적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개인과 사회에 필수불가결인 유급과 무급의 돌봄노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로 폭넓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가족 안에서 그리고 국가, 시장, 가족, 공동체 간에 돌봄 책임을 어떻게 공평하게 재분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정치철학자 조앤 트론토는 민주주의 정치가 돌봄에 대한 책임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민주적 시민은 돌봄에 대한 책임을 분배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모든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돌봄을 필요로 하거나 돌보는 사람에게서 시민의 자격을 박탈하고 차별하고 배제한다. 
    국가는 돌봄의 필요를 시민들에게 직접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돌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가족 안팎에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자는 시장노동에 종사하는 자만큼 시장경제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돌봄노동의 불공정한 배분과 보상이 돌봄을 수행하는 자들의 민주주의적 시민권을 제약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야 한다. 인간에겐 자립과 자조 말고도 협동과 돌봄의 욕망도 함께 존재한다. 시민권의 핵심적 자격요건에 돌봄 수행을 포함시켜야 하며 기존에 여성의 일이라 간주되었던 돌봄노동은 남녀 모두의 기본적인 시민적 역할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라는 인구학적 경향과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지배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돌봄 경제를 재조직하는 데 국가의 책임을 요구한다. 돌봄 경제를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돌봄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돌봄 사회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할 뿐 아니라 돌봄노동이 공적 편익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돌봄으로부터 해방될 권리, 돌봄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질 권리, 돌봄을 받을 권리가 시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돌봄을 받을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려면 공적 전달체계 구축, 이용자의 권리 증진, 서비스 품질 관리가 중요하다. 돌봄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임금수준과 근로조건에 대한 적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권리가 평등하게 확보되기 위해서는 시장노동과 돌봄노동의 균형, 남성과 여성의 돌봄 공유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돌봄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서는 돌봄노동자의 목소리를 정책 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가 예산뿐만 아니라 인력 운용, 품질 관리, 이용자 사례 관리 등을 통합할 수 있어야만 돌봄의 노동권과 사회권의 대립을 극복하고 이용자와 노동자가 모두 행복하고 만족한 돌봄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참고문헌]
 

Arat-Koc, S. 2006, "Whose Social Reproduction? Transnational motherhood and challenges to feminist       political economy," in K. Bezanson and M. Luxton (eds.) Social Reproduction: feminist challenges to Neo-     liberalism, Montreal and Kingston: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Floro, M. 2012, “The Crises of Environment and Social Reproduction: Understanding their Linkages”.
      (http://www.american.edu/cas/economics/pdf/upload/2012-4.pdf).

Folbre, N. 1994, Who Pays for the Kids?: Gender and the Structures of Constraint, Routledge.
Peng, I. 2009, "The Political and Social Economy of Care: Republic of Korea Research Report 3", UNRISD.
Sakiko, F. 2003, "The Human Development Paradigm: Operationalizing Sen's Ideas on Capabilities," Feminist     Economics, 9(2-3), pp.301-17.
Tronto, Joan. 2013, Caring Democracy: Markets, Equality, and Justice, Aporia Books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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