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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프랑스와 한국, '두 대선' 이야기

이준석의 '파시스트 까방권' 가진 프랑스인들은…
  • 입력 2021.12.08 14:20      조회 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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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내년 3월 9일에 제20대 대통령이 선출될 예정이다. 그런데 한 달 뒤인 4월 10일에는 프랑스에서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된다. 비슷한 시기에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2020년대의 남은 시간 중 절반 넘는 세월 동안 정부를 이끌어갈 수반을 선출하는 것이다.

본래는 시기가 이렇게 겹치지 않았다. 그러나 2016-17년 촛불 항쟁과 조기 대선 때문에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대선 일정과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선 일정이 불과 한 달 간격으로 잇따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2017년 대선 때부터 한국 대선과 프랑스 대선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며칠 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다. 소위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 가운데 누가 덜 혐오스러운지를 놓고 경쟁하는 한국 대선판을 개탄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실시되는 프랑스 대선과 견줘 조목조목 비판해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선이 한국 대선보다는 틀림없이 낫겠지 하는 전제를 깐 물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물음에, 자칫 퉁명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도 개판인데요." 그렇다. 2022년 봄으로 예약된 두 나라 대선 모두 지금 개판으로 흘러가고 있다.

겉만 보면 멀쩡한 프랑스 대선 정국

겉만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의 현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이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급조된 정당 '앙 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의 약칭)' 소속인 그는 별 이변이 없는 한 내년 대선에도 출마할 것이다. 모든 여론조사 결과는 마크롱 대통령이 출마하기만 하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할 것이며 결선투표에서는 어떤 후보와 맞붙어도 이길 것이라고 예고한다.

'어떤 후보와도'라고 했지만, 제일 중요한 상대는 역시 국민전선 소속의 마린 르펜이다. 유럽 극우정당 가운데에서도 긴 역사와 탄탄한 지지 기반을 자랑하는 국민전선을 이끄는 여성 정치인 르펜은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21.3%를 득표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1위를 한 마크롱과의 차이는 겨우 2.7% 포인트였고, 결선투표에서는 득표율을 33.9%로 늘렸다.

마흔 살이 갓 넘은 마크롱이 신생 정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2017년의 신화는 실은 별개 아니다. 그것은 르펜 대통령 당선을 막으려는 궁정 암투였고, 마크롱은 이를 위해 간택된 한낱 장기 말일 뿐이었다. 어쩌면 마크롱은 진짜 주인공 르펜을 가리는 배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재계와 정치권, 언론계의 거물들은 예측 불가능한 극우 정권이 등장해 프랑스 사회를 노골적 내전 상태에 빠뜨리길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뤽 멜랑숑 같은 선명한 좌파 인사가 국민전선의 대항마로 떠오르는 것도 당연히 바라지 않았다. 이런 파국을 피하자면, 결선투표에서 체제를 옹호하는 이른바 '중도'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르펜을 쉽게 이길 수 있는 카드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사회당이 희생양이 됐다. 제5공화국의 건설자인 샤를 드골이 물러나고 프랑스 노동계급의 정당 공산당이 점차 와해된 뒤에 거의 한 세대 동안 제5공화국은 드골주의 우파와 사회당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 시기의 영국 노동당과는 달리 사회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완전히 변신하지 못한 채 지지 기반만 흔들리고 있던 사회당은 프랑스 자본주의 체제에 더는 이용 가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회당의 대다수 현실 정치인들과 일부 중도우파가 헤쳐 모여 '앙 마르슈!'가 탄생했고, 전 사회당원 마크롱이 그 대통령 후보가 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본대로 마크롱이 결선투표에서 르펜을 이겼고, 두 달 뒤에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는 여당 '앙 마르슈!'가 압승을 거뒀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내년에도 이런 일이 거의 그대로 반복될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현재 25% 정도의 안정적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반면 르펜은 올해 한때 마크롱과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가을부터 하락세를 보여 현재는 마크롱에게 5%포인트 가량 밀리며 2위에 머물고 있다. 2017년처럼 두 사람이 다시 결선투표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러면 결과는 빤하다. 어떤 여론조사에서든 '55% 대 45%' 구도로 마크롱이 르펜을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반유대주의에 역사적 뿌리를 둔 극우정당의 승리는 다시 한 번 무산될 것이다. 비록 임기 중에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위기 속에서 프랑스 자본주의를 안정적으로 관리한 마크롱의 시대가 5년 더 연장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에 이어 사회당을 무너뜨리며 등장한 정당 구도와, 대통령과 하원을 비롯해 모든 선거에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가장 세련된 형태인 결선투표제를 적용하는 정치 제도가 제 몫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프랑스 제5공화국 정치 시스템의 승리가 아닌가.

과연 그럴까? 지금 이런 태평한 진단을 위협하는 새로운 변수가 돌출하고 있다. 국민전선 바깥의 또 다른 극우파 에릭 제무르가 일으키는 심상치 않은 바람이 그것이다.

'파시스트 까방권'을 지닌 극우파 에릭 제무르

가을부터 프랑스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 갑자기 등장한 이름이 있다. 에릭 제무르다. 그는 소속 정당도 없고, 아직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공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그의 출마를 기정사실화한다. 여론조사에서 제무르의 지지율은 이미 15%를 넘어섰고, 마크롱, 르펜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다.

1958년생인 제무르는 오랜 경력의 언론인이다. 정통 우파 일간지 <르 피가로>의 기자로 있었고, 2010년대에는 여러 방송사에서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이끌며 유명해졌다. 한국으로 치면, '썰전' 같은 프로그램으로 스타 논객이 된 셈이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한 쪽에서는 '시원하다'며 박수 소리가 요란했고, 다른 쪽에서는 '막말'이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면서 그의 명성 혹은 악명은 더욱 높게 치솟았다.

도대체 발언 내용이 어떻기에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뉠까? 제무르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2014년도 저작 <프랑스의 자살>에 그의 생각이 선명히 담겨 있다. 그는 프랑스가 이민 증가 탓에 파멸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합법 이민이든 불법 체류든 차이가 없다. 무슬림이든 아프리카계든 마찬가지다. 모든 이민은 중단돼야 하며, 기왕에 이주한 자들은 기존 프랑스 사회에 철저히 복속돼야 한다. 아랍어 이름 따위는 '장'이나 '폴', '앙리'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프랑스 인구는 이민자와 그 자손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자살'이다.

너무 익숙한 주장이다. 마린 르펜이 입이 닳도록 반복하는 이야기이고, 도널드 트럼프나 나이젤 패러지(영국의 극우 정치인)의 단골 레퍼토리다. 게다가 인종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를 공격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인종이나 젠더 차별을 비판하는 주장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후퇴한 뒤에 좌파가 꺼내든 새로운 무기에 불과하다고 하며, 개인으로서 동성애자는 인정할 수 있지만 사회 세력으로서 게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요설을 늘어놓는다.

이런 주장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뭐라 불러야 할까? '극우 선동가'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무르는 이런 규정을 용케 피해 다닌다. 아니, 그에게 이런 이름을 붙이길 애써 피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무르가 유대인이어서다.

제무르는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유대인 부모의 자식이다. 마린 르펜의 아버지이자 국민전선의 오랜 지도자 장-마리 르펜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프랑스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국민전선을 키워왔다. 그런데 반유대주의의 공격을 받으며 자라난 이민 2세대 제무르는 지금 국민전선과 같은 편에 서서 무슬림과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을 공격한다. 요지경 같은 세상사다.

한데 이런 곡절 덕분에 제무르는 아무리 극우적 선동을 늘어놓더라도 프랑스 사회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에 제 발이 저린 유럽 사회에는 기이한 콤플렉스가 있으니, 유대계 시민은 절대 극우파일 수 없다는 이상한 전제가 그것이다. 그래서 많은 논평가들이 제무르를 국민전선과 같은 '극우'라 부르길 꺼려하며 굳이 '정통 우파'라 분류한다. 시쳇말로 '파시스트 까방권(면죄부)'을 지닌 파시스트인 것이다.

지금 이런 제무르에게 상당수 프랑스 유권자들의 지지가 모이고 있다. 제무르가 대선에 뛰어들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르자 삽시간에 상당수의 지지층이 결집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물론 기존 르펜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더 많은 수는 제무르라는 새 카드의 등장을 계기로 극우파를 지지하기 시작한 이들이다. 국민전선의 반유대주의 전력 탓에 극우파를 선택하지 못하던 이들, 국민전선의 극우 '노동계급 정당' 성격이 못마땅하던 나이 많은 중산층 등이다.

그렇다고 선거의 대세가 바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예정된 승자는 마크롱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마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극우 정당들(나치는 단지 그 중의 하나였다)처럼 극우 대표 주자 자리를 놓고 마린 르펜과 에릭 제무르가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극우파 지지층 총합이 전체 유권자의 40%로까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르펜의 2017년 대선 결선투표 득표율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다.

사정이 이렇다면, 과연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정치 시스템이 프랑스 사회의 극우화를 막는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마지노선 자체가 막상 실전에서는 부질없지 않았던가? 극우파 집권을 단순히 지연시키기만 하는 정치 시스템 아래에서 프랑스 사회는 오히려 더욱더 극우화하고 있다. 유례없는 안정을 구가하는 듯 보이는 정치 시스템 아래에서 사회는 더욱 병들고 있다.

뿌리가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프랑스 제5공화국과 대한민국 제6공화국

프랑스는 현재 한국 정치 시스템에 불만인 이들에게 흔히 선진적 참고 대상 중 하나로 거론된다. 가령 제6공화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하면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의 이원집정부제를 대안으로 내놓는 이들이 있고,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부분적 교정책으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막상 프랑스 현실을 보면, 배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이원집정부제라고 하는데, 2002년부터는 대선 두 달 뒤에 하원 총선거를 실시하기에 대선 승리 정당이 하원에서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원내 다수당이 총리를 배출한다지만, 실은 대통령이 의회까지 지배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면, 현재 프랑스는 '황제적 대통령제'다.

또한 결선투표제도 한계가 많다. 비록 한국에 비해서는 여러 정당이 왕성하게 활동한다지만, 의회는 결국 양대 정당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소선거구 결선투표에서 당선자를 내려면, 드골주의 우파와 '앙 마르슈!'(전에는 사회당)라는 양대 정당 중 어느 한 쪽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이 장벽을 뚫고 차지할 수 있는 의석이란 저 강력한 국민전선이나 유구한 역사의 급진좌파도 몇 석 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고자 이미 몇 차례나 전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즉, 프랑스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제도정치)가 서로 크게 괴리돼 있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역시 한국처럼 국가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다. 이 권력이 실제로 과도하게 구사되든 아니면 단지 정책적 사보타주에 이용되든, 이 권력과 시민사회 사이의 유기적 연관은 지극히 빈약할 따름이다. 이런 '민주주의' 아래에서 지금 프랑스는 유럽 극우화의 선봉을 달리고 있고, 한국은 사회의 위기 양상과는 동떨어진 대선 잔치를 벌이는 중이다.

어떻게 하면, 이 '민주주의'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일단 문제가 단순히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혹은 이원집정부제냐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정치사회 내부의 구조 문제를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연결하는 정당 구도 및 선거제도의 문제와 하나로 엮어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진 두 가지 질병, '프랑스 제5공화국 병'과 '대한민국 제6공화국 병'의 효과적인 처방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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