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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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제6공화국의 시간 감각에서 벗어나자
'기후 팸플릿'의 시대, 이제 6공화국의 단단한 성벽에 균열을
다시 팸플릿의 시대가 오는가? 요즘 큰 서점에 가면, 문고보다 오히려 팸플릿에 더 가까운 작고 얇은 책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오랫동안 보기 힘들었던 출판 형태인데,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만도 않다.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 들여다보면, 유독 기후위기 관련한 책이 많다.
며칠 전에는 한티재출판사의 팸플릿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한재각의 <기후정의: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가 나왔고, 더불어 같은 시리즈의 또 다른 책으로 여럿이 함께 쓴 <기후위기와 탈핵: 핵발전은 기후위기 대책이 될 수 없다>도 출간됐다. 이 출판사는 2019년에도 그레타 툰베리의 글을 모아 역시 팸플릿 형태인 <1.5 그레타 툰베리와 함께: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위한 긴급 메시지>를 낸 바 있다.
그림1. <기후정의 :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에서> (출처 : 도서출판 한티재)
그런가 하면 작년 말에는 100쪽이 안 되는 <기후정의선언: 우리는 실패할 권리가 없습니다>도 마농지 출판사에서 나왔다. 프랑스의 기후운동단체 '우리 모두의 일'이 2019년에 발표한 선언문을 발 빠르게 우리말로 옮겨 낸 책이다.
왜 다른 주제도 아니고 하필 기후위기를 중심으로 이렇게 팸플릿이라는 출판 형태가 부활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은 팸플릿이 필요하게 된 시대란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 속에서 팸플릿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을 꼽아보면, 가령 프랑스 대혁명 직전을 들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광주항쟁 직후, 제5공화국 초기에 조악한 지하 유인물이지만 분량이나 성격상 팸플릿이라 할 수 있는 문서들이 치열한 독서와 토론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모두 다 커다란 정치적 변혁을 앞둔, 긴장되고 급박한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과연 그런 시기라 할 만한가?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코로나19 위기 속에 살아가면서도 우리 시대가 위에 예로 든 때들만큼 긴장되고 급박하다 느끼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팸플릿의 시대가 다시 왔음을, 다시 와야 함을 실제 그런 출판물을 내며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를 놓고 말이다.
대다수 시민의 시간 감각과, 지구가 인류에게 다그치는 시간 감각 사이의 이러한 심각한 어긋남.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닥친 크나큰 도전이다.
다시 팸플릿의 시대가 오는가?
이참에 나는 제6공화국의 정치적 시간 감각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굳이 '제6공화국'을 앞에 내세운 것은 1987년 이전과 이후에 대한민국의 정치적 시간 감각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의 시간 감각은 옛날이든 지금이든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적' 시간 감각이다. 제6공화국 이전에는 지배 세력이든 저항 세력이든 정치적 시간을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느꼈다. 지배 세력과 저항 세력 모두 뚜렷한 한계 안에 팽팽히 응축된 시간 지평 속에 살았다.
지배 세력은 산업화의 시간을 살았고, 이것을 대중에게 강요했다. 그들에게 산업화란 오늘 실패하면 내일 다시 하고 대대손손 이어가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체제 선전에 부합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보다 냉정하게 지구자본주의가 발전도상국에 허용하는 흔치 않은 기회를 부여잡기 위해서든 산업화에는 타이밍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경제개발계획의 당면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이번 세대 안에 완수해야 할 과제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란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그런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에 따른 시간 감각이 군사독재정부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다. 그들의 시간 지평에는 뚜렷한 한계선이 존재했다. 적어도 언제까지는 무엇무엇을 달성해야 한다는 시한이 그들의 삶에 생생히 각인됐고, 그들은 그 시한 안의 한정된 시간을 목표 달성을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그것은 초가 모여 분이 되고 분이 모여 시가 되는 시간이 아니었다. 시를 분으로 쪼개고 분을 초로 쪼개어 삶을 갈아 넣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저들의 독재는 이런 시간 감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랬기에 저항 세력 역시 비슷한 시간 감각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배 세력이 산업화의 시간을 살았다면, 저항 세력에게 그것은 민주화의 시간이었다. 이들에게 민주화란 이번 선거에도 외치고 다음 선거에도 외치면 되는, 평생 함께 할 구호가 아니었다. 지배 세력의 산업화 기획과 마찬가지로 저항 세력의 민주화에도 엄연한 시한이 있었다. 비록 독재자가 공언한 정치 일정과 얽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민주화란 정해진 일정 안에 달성해야 할 절박한 과제였다.
제4공화국에서는 독재자가 눈에 띄게 노쇠해갈수록 반헌법적인 유신 독재를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는 초조함이 확산됐고, 제5공화국에서는 아예 독재자가 박아놓은 대통령 임기 7년과 연동된 정치 일정이 민주화를 몰아붙여야 할 시한을 규정했다. 그랬기에 이때의 가장 보수적인 민주화운동가조차 지금의 극좌 혁명가보다 훨씬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를 미래의 혁명이란 결코 혁명적일 수 없으며, 오직 시계 바늘에 쫓기며 다음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만이 참으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민주화 세력 역시 한정된 시간을 더 많은 행위의 순간으로 쪼개고 또 쪼개는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지나간 옛 이야기다. 1987년 민주항쟁으로 극히 불완전하게나마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서자 더는 이런 시간 감각에 맞춰 살 필요가 없게 됐다. 적어도 양김 씨가 차례로 대통령이 되고 한국 사회가 지구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체계 안에서 제 자리를 찾은 뒤에는 그랬다. 이제는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정치적 시간을 통해 일상을 채근할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일상의 시간 감각이 곧바로 정치 역시 지배하게 됐다. 하루가 모여 달이 되고 해가 되듯이, 정치 생활에서도 이번 선거에서 다음 선거로, 다음다음 선거로 이어지는 시간이 상식이 되고, 주된 리듬이 되고, 기본 감각이 됐다.
실은 이게 현대 자본주의의 '정상적' 시간 감각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많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속속 이런 시간 감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다만 한국 사회는 불과 30여 년 전에야 이 대열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적응 속도는 유난히 빨랐다. 특히 민주화 흐름을 이어받았다는 정치 세력의 적응은 놀라웠다. 그저 적응만이 아니었다. 이들이야말로 제6공화국의 정치적 시간 감각이 확고히 뿌리내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불과 20여 년만에 이들은 오직 다음 선거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정치 문화 외에 민주주의에서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아마도 '민주화운동'을 대학 총학생회의 선거, 사업 일정, 회계연도와 다르지 않은 것쯤으로 여겼던 그들의 출발점에 이런 탁월한 적응력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제6공화국의 시간 감각과 충돌하는 기후위기의 시한
기후위기를 다루는 팸플릿들은 바로 이런 제6공화국의 정치적 시간 감각과 정면충돌한다. 저자들이 굳이 팸플릿을 쓰는 이유는 할 말이 적어서가 아니라 독서와 행위, 각성과 실천 사이의 시간적 거리조차 어떻게든 좁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시간은 제한돼 있고, 순간순간마다 시간의 끝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제6공화국의 정치 문화에 이질적인 시간 감각도 없을 것이다.
기후위기를 고민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한재각은 <기후정의>에서 그 이유를 '탄소예산'을 통해 너무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툰베리는 2019년 프랑스 하원에서 연설하면서 "탄소예산을 아느냐"고 일갈했다. 탄소예산을 안다면, 기후위기를 마주하며 이토록 태평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탄소예산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 그대로의 '예산'은 아니다. 이는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특정 온도 이내로 막기 위해서, 인류에게 허용될 수 있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기후정의> 89쪽)이다. 가령 2014년에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이번 세기 안에 기온 상승을 2도로 묶으려면 전 세계의 탄소예산은 2,900GtCO2eq[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모든 온실가스들을 합산한 지구온난화 지수]라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2011년 기준이기에, 2011년까지 이미 1,900GtCO2eq를 배출했고 한해 배출량이 50GtCO2eq가 넘음을 감안하면, 총배출량이 2,900GtCO2eq를 넘는 데는 2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즉, 20년 이내에 탄소예산이 바닥나는 것이다.
기온 상승 목표치를 1.5도로 묶는다면, 사정은 더 절박해진다. "3분의 2 확률로 1.5도 목표를 달성한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기후정의> 92쪽). 남은 시간이 불과 10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의 탄소배출제로 시점으로 선언한 '2050년'은 먼 미래처럼 느껴지지만, 탄소예산을 환산해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계산하면 이렇게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일상의 시간 감각으로도 '10년 이내'란 '2050년'보다는 오히려 '내일'쪽에 더 가깝게 들린다.
그렇기에 시계 바늘만 봐도 속이 타들어가는 이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통로가 팸플릿이다. 마치 광주항쟁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숱한 골방에서 흐릿한 글씨의 유인물이 만들어지고 읽혔던 것처럼, 이들은 팸플릿을 통해서라도 동료 시민들에게 호소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아니 지금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2050년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전환의 일정에 돌입해야 한다고. 마치 과거의 산업화, 민주화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이 과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그러나 거대하고 단단한 성벽, '제6공화국'이 이 외침을 가로막고 있다. "제6공화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 다들 헌법 개정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극복해야 할 대상은 이보다 복잡하다. 그 핵심에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제6공화국의 정치적 시간 감각이다. '그린뉴딜'을 말하면서 동시에 오직 이번 선거를 위해 '신공항' 또한 약속할 수 있는 정치의 토대가 되는 시간 감각. 이것과 대결하고 종내는 넘어서지 않는 한,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은 결코 시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