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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격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의 위기, 그리고 우리의 선택
- 입력 2023.09.15 14:25 조회 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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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격변의 세계질서와 한반도의 위기, 그리고 우리의 선택-김준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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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한동대학교 국제지역학과 교수
-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립외교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사단법인 외교광장 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대한민국이 온다》 등이 있다.
1. 격변의 세계질서와 동북아
오늘날 국제질서는 지난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탈냉전 체제의 협력적이고 통합적인 글로벌 거버넌스가 무너지는 한편, 배타적 민족주의와 지정학적 진영대결 구조가 급부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초강대국들의 세력 변동으로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와 더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탈냉전 이후 한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 작동했던 글로벌 거버넌스는 무력화하고, 지정학의 도래와 각자도생의 파편화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미디어는 물론이고, 여러 국가는 이미 공식적으로 현 국제질서를 신냉전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현 국제질서를 신냉전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의 체제가 다르고, 미국이 대중봉쇄를 위해 노골적으로 가치와 이념에 의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진영을 나누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신냉전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섣불리 신냉전으로 규정하면 과거처럼 하나의 진영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다. 미국의 주도로 추진되는 글로벌 진영화의 이면에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서로 다른 실익 추구가 작동함으로써 진영의 경계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미·중 관계가 악화일로로만 간다는 진단도 섣부른 예단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 중국이 연대하고, 북한 역시 대중·대러 접근을 서두름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한 협력을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미·중 이외의 다극질서를 촉진하는 신호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브릭스(BRICS)의 급부상이 기존 세계 경제의 지배력을 가진 G7을 맹추격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역전도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이런 현상들은 과거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양분하고, 각 진영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러한 파편화와 다극화 현상이 신냉전보다 바람직하다거나, 또는 위기가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편에서는 신냉전의 담론에 올라탄 미·중 대결구조가 펼쳐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극의 행위자들이 협력보다는 각자도생의 국가 이기주의가 판을 칠 때 세계는 훨씬 더 혼란스럽고 위험해질 수 있다. 한마디로 기존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대체 시스템이 없는 상태로 혼란과 무질서는 가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중 갈등은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최소한 30년 이상 지속할 소모전 양상이라는 점에서 진영을 선택하고 한쪽 편에 전부를 거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전략이다. 유연한 실리외교와 함께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장기적으로 양측 모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이 최선이다. 국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미와 친중의 분열 프레임을 이용하는 것은 망국적 행위로 자제해야 한다.(주: 문정인은 최근 발간한 『문정인의 미래 시나리오』에서 미·중 갈등이라는 도전에 직면한 한국 외교가 나가야 할 길을 '진영 외교를 넘어선 초월적 외교'로 제시한 바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상호 간의 직접적인 충돌의 위험부담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로 갈등을 전가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이미 한반도 주변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미, 중, 일, 러의 군비경쟁이 가속화하고, 신냉전 담론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에서 시작된 자국 이기주의는 바이든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가치를 내세우는 등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사성과 연속성이 더 뚜렷하다. 바이든은 ‘점잖은 트럼프’라고 불리고, 그의 동맹 및 안보 전략은 네오콘의 노선과 유사하다. 아시아전략의 핵심은 한·미·일을 묶어 중국을 봉쇄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가장 충실하게 추종하는 윤석열 정부는 집권 이후 냉전체제로의 퇴행적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힘을 통한 평화를 앞세우며 선제타격론과 전쟁 불사론을 내뱉고, 이는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와 무력시위의 빌미로 작동한다.
한국은 구한말과 세계대전의 전환점에서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충돌지점으로서 겪었던 위기를 다시 맞을 수 있다. 1990년대 초 냉전체제 붕괴와 탈냉전 도래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분단 구조를 해체하지 못했고, 2018년 큰 희망과 기대를 품게 했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 이후 기나긴 교착에 빠져들었다. 이후 북미 및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였고, 미·중 및 미·러 관계의 악화와 2022년 5월 보수 강경의 윤석열 정부의 집권이 더해지면서 지정학의 도전은 가속화되었다.
2.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
당면한 우리의 위기는 단발성이 아니며,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후의 얄타·포츠담 체제와 미국의 전후 아시아 정책의 근간인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과 깊이 연결되어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독일)과 아시아(일본)에 대한 전후처리 방식은 달랐다. 독일에 관해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전쟁 재발을 막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공동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주 : Christopher Layne, "Iraq and Beyond: Old Europe and the End of the US Hegemony," In Christina V. Balis and Simon Serfaty (eds.) Visions of America and Europe: September 11, Iraq, and Transatlantic Relations (Washington D.C. CSIS, 2004), p. 54.) 유럽은 피해 당사국들의 철저한 과거청산 요구가 있었으며, 미국은 분단을 통해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시아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미국이 앞장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과거사 청산을 축소 또는 면제했으며, 독일처럼 일본에 대해 분단을 통한 약화도 추진한 바 없었다.
독일의 경우는 ‘강요된 철저한 과거청산’에 의해 과거로부터의 단절에 중점을 두었다면, 일본은 변화를 미국이 보장하는 일종의 ‘강요된 미래의 평화’라고 할 수 있다.(주 : 서승, “미·일 동맹에 종속하는 한미일 동맹,” 『아시아문화』, 2015년 9월, 통권 17, pp. 24~25.) 독일과 일본 모두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반공의 전위대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과 전개 과정은 상이함을 보이면서 오늘날 전혀 다른 전후 체제를 구축해왔다. 일본의 전후 체제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외면한 채,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기지 국가의 역할을 충실히 행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말미암아 전후 아시아의 냉전체제는 한국, 미국, 일본을 세 개 축으로 하는 남방 3각 진영과 북한, 중국, 소련의 북방 3각 진영 간 대립 구도가 구축되었다. 남방에서는 미국을 핵심축으로 한 1951년 9월 미일안전보장조약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유사 3각 동맹체제를, 북방에서는 북한을 축으로 하여 1961년 조·소 우호조약과 조·중 우호조약을 각각 체결해 유사 3각 동맹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구도로 인해 냉전체제 붕괴 이후에도 북미 간 적대관계가 유지되었고, 진영대결이 지속되었다. 동·서독의 분단 축은 소련의 붕괴로 인해 미·소 적대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해소되었다. 반면에, 한반도의 경우 북미의 대립 관계가 당시에도 해소되지 못했었고, 분단과 대결의 구조가 이어져 온 것이다.
미국이 2차대전 후 아시아전략으로 구축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을 중심에 놓고 아시아 주요 국가들과 다수의 비대칭 양자 동맹을 구축하는 방식이었다. 개별적인 양자 동맹을 통해 미군이 직접 주둔해 안보 우산을 제공함으로써 중국과 소련에 대한 반공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도 같은 방식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하면서 다수의 양자 동맹만으로는 북방 세력 견제의 한계를 느끼고 미국은 동맹국 간의 연결도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과 소련과 인접한 한국과 일본의 연결이 중요한 전략적 고민의 하나였다.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이라는 두 개의 양자 동맹을 3자 동맹으로 연결하려는 본격적 시도는 레이건 정부에서 나왔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1970년대 데탕트는 다시 동서 대결구조로 돌아선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면서 냉전 대결 체제의 부활을 알렸다. 해당 시기 레이건은 미·일 관계를 ‘운명 공동체’로까지 부르면서 단결된 대소련 방위를 약속했다. 미국의 요구에 일본의 나카소네는 적극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 취임 후 방미 길에 한국을 들러 전두환과 만나 전략적 공조를 시도한다. 이들 3각 협력은 1987년 12월 미·소 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 체결되기까지 견고하게 유지되었다가, 탈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동맹의 제도화는 멈췄다. 3국 극우 정부라는 최고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대외환경이 3자 동맹을 밀어붙이기에는 냉전체제가 수명을 다해버렸다.
그러나 미국은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숙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미·일 동맹화가 재시도된 것은 조지 W. 부시 정부다.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벌어지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부시 정부에서 재등장한 네오콘 세력은 신안보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동맹국들을 결집하려 했다.(주 : 정승욱, “미·일은 최고 동맹, 부시·고이즈미 회담서 우의 과시,” 『세계일보』, 2005년 11월 17일.) 부시 행정부는 미 해외주둔군 재편정책인 ‘GPR(Global Posture Review)’을 펼치면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려 했고, 한국의 수용을 강하게 압박했다. 미·일 동맹이 강화됨에 따라 동맹국인 한국의 참여 압박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원하는 만큼의 3자 동맹의 제도화는 진전되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나름대로 유사 3각 동맹으로 진전되는 것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한·미·일 동맹화를 위한 세 번째 시도는 오바마 정권 때 이루어졌다. 이전 두 차례와 달리 민주당 정부가 주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미국의 위기감이 당파성을 뛰어넘은 것이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은 전후 얄타·포츠담 체제의 부활이자, 전략적 재활용이라는 함의를 넘어, 전후 지속하여왔던 한·미·일 유사 3각 동맹의 ‘실질화’를 내재했다.(주 : 1965년 한일 수교 당시 일본 헌법 9조로 인해 명시적인 군사동맹은 불가능했다는 점도 유사 3각 동맹의 형태를 유지한 또 다른 이유였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일본의 재무장 제한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고,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일본의 군사 및 경제적 동원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10년이나 끌었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종결로 생긴 여유를 아시아로 돌려 중국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했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은 미국의 해군 전력 중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배치되는 비율을 50%에서 60%로 늘리는 구체적인 계획이 동반되었다. 또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대중봉쇄의 핵심지역으로 삼으면서, 이를 ‘항행의 자유’ 확보로 정당화하는 전략을 펼친다.(주 : 미국은 이를 위해 일본, 필리핀과 해상 안보협력을 위한 협정을 2012년 중반에 체결하였다.)
미국이 한·미·일 3각 군사협력을 구체화한 것은 2012년 6월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과 이듬해 10월의 미·일 외교·국방 장관회담(2+2)에서였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한·미와 미·일의 위협인식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한·미·일 협력의 또 다른 핵심은 단일전장을 전제한 동북아지역 미사일 방어망의 구축이다. 사드 배치도 한국의 미국 MD 체제 편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미 2+2회의에서 나온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한 “포괄적인 연합방어” 태세는 역설적으로 ‘한국형’ 미사일 방어망이 미국의 MD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박근혜 정부 당시 오바마와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강조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 뜻하는 바다.
밀실에서 추진하다가 국내 여론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2012년 무산되기는 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추진했던 이유다.(주 : 2013년 6월 24일 미 의회조사국(CRS)은 <한일정보보호협정>이 한·미·일 3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 조치였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Ian E. Rinehart, Steven A. Hildreth, Susan V. Lawrence, “Ballistic Missile Defense in the Asia-Pacific Region: Cooperation and Opposition,” CRS Report, June 24, 2013, p.17.) 유사 3각 동맹의 추진은 일본 군사화 및 우경화에 대한 한국 국민의 감정이 악화하면서 주춤하다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일 관계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러던 중 2014년 3월, 헤이그에서 미국의 중재로 열린 한·미·일 3자 회담의 분위기를 살려 한·일 양국의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의 체결 노력도 이어졌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주춤하게 된다. 2018년 남·북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진전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졸속으로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에 대한 반대 여론과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판결로 인한 한·일 관계 악화로 미국의 3각 동맹 추진은 브레이크가 걸렸다.
사실 미국은 한·미·일 군사협력 구축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한·일 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해왔다. 본래 미국에는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도덕적 우위를 인정하는 한편, 반성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 일본의 반역사적 행동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략적 필요가 우선시되면서 한국의 입장을 고려할 이유가 없어졌으며, 일본이 미국의 아시아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우경화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 가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치와 인권을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당 정부마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이젠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는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관점에서 한·일의 역사대립은 군사적 협력을 저지하는 방해물로 여겨졌다.(주 : 2015년, 웬디 셔먼 당시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워싱턴DC 카네기 국제연구원 세미나에서 "한국과 중국이 소위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쟁하고 있으며 역사 교과서 내용, 심지어 다양한 바다의 명칭을 놓고 이견이 표출되고 있는 데 대해 이해는 가지만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한국과 중국이 과거에 매달린다고 탓하며 일본의 입장을 변호하는 발언을 했다. Wendy R. Sherman, “Remarks on Northeast Asia,”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U. S. Department of State, Washington, D. C., February 27, 2015.)
오바마 재임 이후 미·일 동맹의 밀월관계는 깊어졌다. 아베 정부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단순한 조응을 넘어 일본의 미래전략으로 활용했다. 핵심은 미·중 갈등 구조를 활용하여 군사적인 제한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재균형 전략은 일본의 안보 정책변화와 수렴하면서, 대중 견제를 기치로 미·일 동맹의 심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3각 공조 참여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5년 미·일 안보 가이드라인의 개정으로 대중봉쇄 목적의 미·일 동맹을 강화했고, 본격적으로 한국에게 진영 선택을 압박해 들어온 것이다.
3. 전략동맹 : 한·미 동맹의 역할 변화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따라, 미·일 동맹과 마찬가지로 한·미 동맹에도 유사한 역할 변화의 압력이 가해졌다. 즉, 대북 억지에 한정된 주한미군이 미국의 세계 전략에 맞추어 지역군화하고, 한·미 동맹도 역시 이런 목적을 위해 변화를 요구받은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지연 또는 제한 노력은, 정권이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무위로 끝나버린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부시 행정부와 ‘21세기 전략동맹’에 합의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미·영이나 미·일 동맹에 버금가는 한·미 동맹의 격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체는 ‘전략적 유연성’을 포함한 미국의 전략을 우리가 전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본래 한·미 동맹은 전형적인 비대칭 동맹으로서, 약소국 입장의 한국이 안보를 보장받는 대신 강대국인 미국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균형적 관계다. 이는 냉전 구조 속에서 한국의 안전보장에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계적 한·미 동맹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범한 새로운 ‘한·미 전략동맹’은, 오히려 근본적인 동맹 결성 목적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주 : 한미동맹에서 미국의 통제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올리버 윌리엄(Oliver E. William)이 주장하는 '자산 특수성(asset specificity)'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특수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다른 대안적 관계들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받게 되어 좀처럼 변화하기 어렵다. 즉 제도가 보편적이고 규격화되면, 다른 제도와의 차이가 없기에 제도의 전환에 대한 수용의 가능성이 크지만, 특이할수록 한번 안정성을 확보하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Oliver E. William, The Economic Institutions of Capitalism: Firms, Markets, Rational Contracting (New York: Free Press, 2002).) 특히, 그 새로운 전략에는 한·미 동맹이 동아시아 지역 및 범세계적 차원의 전략적 이익을 공유함으로써 국제평화에 기여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맹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전 세계까지 확대한다는 의미다. 해당 내용은 미국 측의 치밀한 작업의 결과였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전 독자적으로 전략동맹을 천명하게 만듦으로써 한국이 주도하는 모양새를 갖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당시 주한 미국대사 버시바우가 본국에 “한·미 동맹을 위한 비전 2020”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거기서도 같은 내용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주 : 김용진,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서울: 개마고원, 2012).)
전략동맹은 박근혜 정부로 계승되었는데, 2013년 5월 오바마와의 첫 정상회담에서 이를 확인해주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의 21세기 글로벌 파트너로 ‘격상’되는 것이 곧 국력에 맞는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로, 대미 의존관계를 탈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글로벌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세계 전략적 필요에 따라 우리 군대와 물자가 동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방위비 분담 증가와 무기 구매 압력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높였다. 오바마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마다 직후 양국이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해, ‘포괄적이고 상호운용이 가능한 미사일 방어’를 통한 ‘연합방위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었다.(주 : “Remarks by President Obama and President Park of South Korea in a Joint Press Conference,” White House, May 7, 2013.) 정리하자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보수 정권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적이고 구조적 변화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미국의 세계 전략 변화에만 충실히 조응하는 결과를 낳았다. 표면적으로는 동맹의 격상이라는 슬로건을 강조했지만, 그저 대미의존적인 관계를 답습하고, 미·중 및 미·러 갈등이 심화하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한국이 끌려 들어가는 동맹의 연루 위험을 증가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즉, 한·미의 전략동맹은 샌프란시스코 체제 재활용, ‘전략적 유연성’ 확보, 그리고 한·미·일 유사 3각 동맹의 실질화로 이어지는 미국의 아시아전략에 최적화하는 요소로 기능하였다.
미국으로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열심히 기초를 닦아 놓았고, 문재인 정부로 인해 지연되었다가, 윤석열 정부에 와서 기회를 다시 얻은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을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그 이행 방안을 긴밀히 논의했다고 밝혔다.(주 : 서영지, “윤대통령-바이든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에 대한 의지 확인,“ 『한겨레』, 2022년 5월 21일.) 이는 2008년 이명박-부시 대통령이 합의한 한미 전략동맹 부활이며, ‘포괄적’이라는 수사는 안보 중심의 동맹을 넘어 외교와 경제까지 범위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2023년 윤 대통령의 방미에서는 분야를 경제동맹이나 문화동맹까지 확대했다. 미국의 제조업 재건을 위해 수십조 원 규모에 달하는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까지 약속했고, 대러 경제제재와 대중 공급망 배제 등에서도 미국 편에 서겠다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과거 노무현 정부 당시 미국이 추진했던 전략적 유연성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활용범위를 확대하는 차원이라면, 최근의 전략동맹에서 규정한 것은 미국의 아시아전략에 한국의 군대가 동원될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대만이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연루 같은 상황이다.
4. 윤석열 정부의 이념 외교와 한-미-일 유사 동맹의 실질화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전임 문재인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으로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했다”라는 식으로 규정하였다. 전임 정부가 신남방정책 등을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태 전략에 동시에 참여함으로써 연결하려 하고, 한반도가 갈등의 중심 무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모호성’이라고 비판하고, 진영을 명확하게 선택했다. 대북 강경 및 친일·친미 노선을 확실히 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후 진영편향의 외교에 일관성을 보여줬고, 내용상으로도 대미 및 대일 외교가 전부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1월 일련의 다자회담에 참석해서 한·미, 한·일, 한·미·일 정상회담을 집중적으로 가졌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전략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천명하고, 한-미-일 3자의 <프놈펜 공동선언>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을 견제하는 해양 세력에 본격적으로 동참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용어에는 대륙이 없고, 대륙을 배제하고 봉쇄하는 해양 세력에 편입된다는 함의를 지닌다. 해당 용어와 구상은 아베 전 총리가 창안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1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아시아전략으로 채택을 수용했으며, 바이든이 명칭 변경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미국이 지휘하는 해양 세력 편에 서고, 미·일과 함께 대륙 세력인 북·중·러를 적대적으로 포위하는 선봉에 서겠다는 전략이 우리 국익에 어떤 의미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 한-미-일을 묶어 북-중-러를 견제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이익이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이익은 결코 아니다. 분단 및 정전 상태에 처한 우리가 한반도와 인접한 대륙 세력인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의문스러운 점은, 안보협력의 파트너로서 일본을 과연 신뢰할 수 있냐는 점이다.
더욱이 당시 프놈펜에서 양자 및 3자 회담에서 어떤 구체적인 합의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정부는 언론의 출입과 취재를 불허했고, 회담 후 설명을 위한 기자회견도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제공된 보도자료의 추상적인 내용만 있었다. 이후 벌어지는 몇 가지 사안들을 연결해보면, 그 회담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첫 번째 연결고리는 프놈펜 선언 불과 한 달 후 이루어진 일본의 3대 안보 관련 문서 개정이다. 해당 개정으로, 일본은 향후 4년간 군사비를 2배로 증액하고, 전수방위를 무력화하고 선제공격이 가능한 군사 대국화를 선언했다.(주 : 일본은 2022년 기준으로 우리보다 많은 500억 달러의 국방비를 향후 5년 내 2배 증가하면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 군사 대국으로 도약한다.) 이러한 발표에 미국은 지지를 보냈다. 한국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행동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기까지 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열도 위로 (북한) 미사일이 날아가는데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라며 일본 군비증강의 정당성을 대변했다.(주 : Soyoung Kim, Jack Kim and Josh Smith, “Exclusive: South Korea’s Yoon Warns of Unprecedented Response to North Korea Nuclear Test, Calls on China to Do More,” Reuters, November 29, 2022.)
두 번째 연결고리는 윤석열 정부가 2023년 3월 6일에 일방적으로 발표한 <강제동원해법>이다. 이는 1965년 한·일 협정 자금을 지원받았던 국내 기업이 자발적 출연으로 기금을 마련해서 대법원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소위 ‘3자 변제’ 방식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반하고, 불법 강점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묵인하며,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뒤엎는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조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을 고스란히 수용한 것이었다. 이토록 황당한 조치를 해법이랍시고 발표한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은 환영 성명을 실시간으로 표시하였다. 이는 미국이 이 모든 과정의 배후임을 자처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가치’를 내세우며 진영을 가르는 미국이, 더욱이 인권과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당 정부가 불의한 과거에 눈을 감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추겨,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굴욕의 <강제동원해법> 발표 10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미국이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그토록 간절히 원했고, 일본이 열심히 장단을 맞췄던 한·일 유사 동맹의 실질화는, 윤석열 정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거칠 것이 없어졌다.
2023년 8월 18일 한·미·일 정상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마침내 안보협력의 제도화에 합의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진영편향 일변도의 외교를 펼쳐왔고, 한·미·일은 이제 사실상 군사동맹의 단계로 들어섰다. 해외언론이나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드디어 아시아에서 신냉전의 막이 올랐다고 평가했다. 최대 승자는 미국이고, 일본도 상당한 이익을 챙겼으나, 한국은 얻은 것은 없고 큰 손해를 입은 일방적 퍼주기였다. 미국은 인도·태평양전략의 약한 고리였던 한·일 관계를 협력적인 관계로 제도화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최고의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뉴욕타임스는 2차대전 이후 그토록 바라면서도 이룰 수 없었던 한·일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 한·미·일의 3각 체제를 제도화겠다는 미국의 외교적 꿈이 실현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역시 많은 것을 얻었다. 한국과의 관계가 악화일로였던 아베 정부 시절에는 한국을 제외한 미·일 동맹 또는 쿼드로 가려던 계획이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은 대륙 세력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노출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이 최전선에 놓여 일본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은 선택이 가능해졌다. 개입하고 싶으면 3국 안보협력을 빌미로 개입할 수 있고, 피하고 싶으면 평화헌법을 내세워 한국에 떠맡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사일 전력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이 정보 실시간 공유를 넘어 미사일방어 체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일본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고 얻었다. 그러나 한국은 밑지는 장사를 톡톡히 했다. 보수진영에서는 대성공이라고 말하고, 확실한 동맹 네트워크를 갖추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주변은 긴장이 고조되고, 북한 문제는 더 풀기 어렵게 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로 들어설 가능성이 커졌다. 그것도 한반도가 중심 무대가 되었다.
5. 대한민국의 선택
윤석열 정부가 주장하는 “힘을 통한 안보”는 오늘날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벌이는 지정학적 충돌 국면과 맞물려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서는 압도적인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식의 전쟁 불사론까지 들먹이면서 긴장 고조를 부추기고 있다.(주 : 박상현, “윤 대통령 “북 무인기 침범 용납 불가…평화 위한 압도적 전쟁 준비,” 『헤럴드 경제』, 2022년 12월 29일.) 물론, 안보는 중요하고,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확보할 수 없다면 그 어떤 계획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다 제쳐두고 맹목적인 전쟁 준비로 다른 중요한 시대적 과제를 희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우선 우리 외교는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를 지향해야 한다. 대외전략 자산의 확대와 다양화 및 다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진영편중의 전략은 우리의 외교 역량을 지정학과 군사동맹의 범위 안에 갇히도록 만들 우려가 있다. 윤 정부의 안보 절대주의와 동맹 신화의 맹목적 추종은 향후 4년간 우리의 역량을 지정학과 미국의 전략적 범위 안에 갇히도록 만들 것이다. 확장억제, 전략자산 전개, 한·미 연합훈련 확대 등을 통한 외교의 안보화와 경제와 기술 등 가히 모든 영역의 군사화는 우리가 선택할 올바른 길이 결코 아니다. 최근 한국의 극우 인사들이 윤 정부의 시대적 사명을 ‘좌파 척결’로 정조준하고, 대통령도 비슷한 어조로 동조의 뜻을 자주 표한다. 이러한 흑백 논리는 대외정책에도 반영되어, 20세기 냉전 시절을 소환하고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미·중 갈등 속에서 다른 국가들이 어떤 외교를 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단순 흑백 논리에 빠져 진영의 선두에 설 때, 도리어 한국이 미·중 갈등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끌어안게 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미·중 전략경쟁의 판에서 배타적 선택의 프레임에 빠져들지 말고, 유사한 입장과 능력을 지닌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완충지대를 구축해야 한다. 미·중 대결구조가 아무리 결정적 변수라고 하더라도, 프레임 안에 갇힌 수동적인 선택의 외교로는 미래가 없다. 한국이 원하는 나라, 한국을 원하는 나라들이 함께 완충과 협력의 연대가 될 수 있는 ‘제3의 지대’를 만들어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 동남아시아, 남미권 국가들이 연대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특히 미·중이 아시아에서 격돌하면서 유럽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전략적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럽이 미·중 대결구조에서 치러야 할 비중은 커지면서, 외교의 중심 무대에서 밀려남으로써 이익이 감소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영·미 동맹을 우선하면서 상대적으로 대륙의 독일이나 프랑스 등 지역 핵심 강국이 소외되는 측면이 있다. 유럽과 더불어 인도, 아세안, 호주 등도 연대에 포함한다면 제3의 지대는 더 큰 영향력을 보유할 수 있고,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미·중 및 미·러 관계가 악화하면서 인류 공동의 과제인 평화, 기후변화, 팬데믹, 핵확산 등에 대한 협력이 사라지고,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개발원조가 후 순위로 밀려나면서 세계의 불안정성이 커지는데, 제3지대가 공백을 메울 수도 있다.
향후 수십 년간 미·중의 패권 갈등은 한국의 대외환경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독립변수가 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양국은 직접 충돌할 경우,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갈등을 전가하려 할 것이고, 대만, 동중국해, 남중국해와 함께 한반도가 유력한 지점들이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 구조는 다른 지점들에 비해 전략적으로 활용 가치가 훨씬 높다. 탈냉전의 세계화 시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한반도 분단 구조는 지정학의 도래와 함께 본격적으로 갈등이 끓어 넘쳐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미·중 관계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가 미·중 갈등의 대리 충돌지점이 되지 않게 하려면 남북한이 긴장 수위를 낮추고 평화공존을 유지해야 한다. 남북이 법적인 통일이나 유무상통의 개방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적대적 관계 해소와 안정적 관리는 절실하게 요구된다. 한반도 긴장이 완화하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남한은 군사동맹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부담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구시대 외교, 특히 과거 냉전체제에서는 이념에 의한 경직된 외교가 필요했고, 또 가능했다. 하지만 탈냉전 이후 한반도 분단과 냉전 구조의 타파를 위해서는 유연한 외교가 절실하다. 미·중 전략경쟁과 동북아의 대립 질서에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한국 외교의 유연성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외교 영역에서 경직성은 국가가 특정 이념에 따라 하나의 노선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외교 노선은 원칙의 함정에 빠져 운신의 폭을 좁혀버리고, 국제무대에서 편 가르기나 진영 프레임에 스스로 가두게 된다. 또한, 창의적인 외교를 통한 현실 개선보다는 현상유지에만 골몰할 위험도 내포한다. 특히 외교 무대에서 아군과 적대적 국가의 이분법으로 사고하게 만듦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축소해버린다.
국익을 생각할 때 이런 배타적 선택의 방식은 전혀 이롭지 못한 외교다. 한국전쟁과 이어진 냉전체제가 장기화하면서 우리에게 새겨진 공포의 잔영이 트라우마로 남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외교는 이제 냉전의 기억과 관성에 벗어나 배타적 선택의 프레임을 탈피하고, 미·중이 우리와 협력을 선택하게 만드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신냉전이라는 섣부른 단정은 피해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로 탈냉전 체제는 종언을 고했다고 할 수 있으나 신냉전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한반도의 분단 구조와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라는 맥락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 신뢰 구축, 군비축소에 대해 합의를 끌어내는 일은 어렵다. 평화체제를 달성하자면 어떤 형태로든 억지 중심의 정전체제와 한미동맹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미 양국 보수세력의 강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동북아의 체계적, 지정학적 변수를 수반하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약화로 권력 이동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지역안정이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미·중 갈등은 최종적으로 누가 승리하느냐를 떠나서 지금의 경쟁 자체가 국제정치 판도를 뒤흔드는 ‘세력 전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국을 합하면 약 60여 국가이고, 중국을 무역 1위로 가진 국가의 숫자는 120개 정도다. 60과 120의 국가군은 상당수가 양쪽에 모두 속한 교집합에 속한다. 한국이 매우 불균형적이기는 하지만, 사실 전 세계가 미·중 사이에 끼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이들 국가와의 연대를 통해 미·중 갈등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고, 미·중 갈등으로 말미암아 협력이 어려워진 기후변화나 핵무기확산 같은 글로벌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미·중 전략경쟁에서 남북한이 대결구조로 갈 경우, 한반도가 다시 대리 희생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으므로 평화공존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발신해야 한다. 평화는 이제 단지 이상이 아니라 국익을 지키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며,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값싼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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