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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 입력 2021.01.04 11:00      조회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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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는 '능력주의'다. 촛불항쟁 이후에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당혹스럽게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논의로 튀고, 조국 법무부장관 논란을 거치며 대학입시제도 중 수시에 대한 불만이 느닷없는 정시 예찬론으로 비화하면서, 능력주의가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떠올랐다. 주간지 특집으로 거듭 등장하는가 하면 믿을만한 저자들의 책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게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국내에서 능력주의를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하면서 새삼 확인된 바는 이것이 지구자본주의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가령 최근에 번역돼 나온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서정아 옮김, 세종서적, 2020, 원제는 "능력주의 함정")은 미국 사회 역시 능력주의의 덫에 걸려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원제는 "능력 독재")은 어느 한국 필자보다 더 격렬하게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둘러싼 독서 목록의 맨 위에 올라야 하는 책은 따로 있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 자체가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으니, 이 주제에 관해서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출간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최근 능력주의 논란 속에 우리말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오래 전에 나온 저작이라 요즘 상황과는 잘 맞지 않겠지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나온 어떤 저작보다 더 명료하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 나는 영의 <능력주의>를 읽으며 다른 글들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이 문제의 중요한 측면들을 새롭게 보게 됐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림1. <능력주의> (출처 : 이매진 출판사)


60년 전에 지금의 '능력 독재'를 정확히 예언하다

한데 영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는 십중팔구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능력주의'란 말을 최초로 소개한 고전이라는 정보 정도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20세기 중반에 쓰인 다른 사회과학 저작들, 가령 C. 라이트 밀즈의 <파워 엘리트>나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비슷한 책을 기대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아니다. 영의 <능력주의>는 '소설'이다!

<능력주의>는 영국에서 이 책보다 앞서 나온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년>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57년에 나온 책인데, 내용은 능력주의 사회가 들어선 지 이미 오래 된 2034년에 마이클 영과 같은 이름을 한 가상의 사회과학자가 1950년대 이후에 능력주의가 발전한 과정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 책이 좀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히길 바랐기에 이런 소설 형식을 취했다고 밝힌다. 저자의 이 전략이 통했는지, <능력주의>는 당시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실제의 2020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이게 도리어 장애물로 다가온다. 화자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가공의 역사 서술과 사회 분석을 전개해, 도대체 이게 1950년대 말 이후 영국 사회에서 정말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허구인지 헛갈린다. 소설이라기에는 너무 건조하고, 사회과학 저서라기에는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한 문장들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를 권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 시대에 쓰인 어떤 글보다 더 풍성한 교훈과 영감, 논점들을 캐낼 수 있다. 무엇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어떻게 지금 우리 사회가 도달한 지점을 이토록 정확히 예언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 점에서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보다 더 섬뜩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가장 명백하게 들어맞은 예언은 요즘도 능력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모든 저작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한, 능력주의와 세습주의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다. 능력주의는 자산과 권력, 명예를 세습하는 구 귀족정을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 젊은이들이 능력주의에 공감하는 것도 마치 이것이 '금수저'들의 세습 질서를 깨고 '공정'을 실현하는 수단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능력주의는 그 신봉자들을 철저히 배신한다.

능력주의는 구 귀족정을 타파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인 듯 보이지만, 능력주의가 만들어놓는 새 질서는 결국 신 귀족정이다. 왜냐하면 능력이란 항상 학교나 시험 같은 역사적 제도들을 통해 육성되고 검증되는데, 이런 제도들은 늘 기득권층에 의해 또 다른 세습의 통로로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는 초기에는 실제 노동계급이나 하위 중산층의 자제들 중에 계급-계층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한 세대만 지나도 사정은 달라진다. 이미 사다리 위로 올라간 이들의 자녀가 다름 아닌 '능력'이라는 명분 아래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능력주의는 어느덧 새로운 세대의 세습주의가 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론이 중산층 세습화 현상을 극복하는 데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전자는 후자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능력주의>는 전후 영국 사회에서 아직 능력주의가 대세가 되기도 전에 이를 정확히 예견했다. 다만 <능력주의>가 잘못 짚은 게 있다면, 현실에 등장한 능력주의 사회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회를 예상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그리는 21세기 사회는 모든 시민에게 '균등급'이라는 이름으로 수당을 지급하며, 일자리가 없는 시민에게는 공공이 나서서 가내 하인 일거리라도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기본소득제와 고용보장제가 실시된다. 게다가 능력주의를 통해 계급-계층 사다리의 맨 위로 올라간 이들이 자산 투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지도 않는다.

<능력주의>가 그린 능력주의 디스토피아는 모종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인 셈이다. 아마도 영은 사회민주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화한 사회조차 만약 능력주의와 결합된다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이렇게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를 '실제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의 <능력주의>가 디스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유토피아 소설로 보일 지경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 지식인-중간층

여기까지는 실은 능력주의를 다룬 다른 책들도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능력주의>는 이 모든 저작들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굳이 21세기에 쓰인 저작들 말고 잘 읽히지도 않는 이 책을 찾아 읽을 이유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한데, 다른 미덕이 있다. 내가 <능력주의>를 읽으면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그 장점이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고 확산시키며 그 승리를 관철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즉, 이 책은 어떤 사회 집단, 사회 세력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인지에 주목한다.

물론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능력주의를 동반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그 내적 필요 때문에 세상에 없던 능력주의를 불러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킨 것도 아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역사적 계보를 달리 하며, 그래서 자본주의와 때로 충돌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대의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가 그렇듯이 최상의 한 쌍을 이루고야 한다.

가령 미국에서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처음부터 거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지만, 저 늙은 대륙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세습주의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이어갔고,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세습주의 대 능력주의'의 대립 구도가 진실의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지구자본주의 곳곳에서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에 최적의 상부구조를 제공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에 뚜렷한 담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자 문학의 맛을 잃지 않으려는 <능력주의>는 그 담지자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지목한다. 저자 마이클 영은 자신을 윌리엄 모리스, G. D. H. 콜, R. H. 토니의 사회주의 계보 위에 올려놓는 반면, 그 반대편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놓는다. 전자는 누구이고, 후자는 누구인가? 전자는 노동계급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리려 한 이들이다.

그럼 후자는? 노동계급을 위한 것은 분명했지만, 노동계급의 시각으로 새 세상을 그리지는 않는 이들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무계획적인 오합지졸 민주주의는 민주적 귀족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곧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해하면서 그 신성한 목표를 향한 질주를 이끌 수 있는 5퍼센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되어야 한다." (<능력주의> 65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페이비언협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이다. 이 발언에서 너무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쇼는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아니라 "5% 프롤레타리아트"의 시각에서 새로운 사회를 전망했다. 그 '5%'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물론 능력주의다.

그리고 영은 이 능력주의를 하나의 간명한 공식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능력주의 = 지능 + 노력"(<능력주의> 152쪽)이다. 여기에서 '노력'이란 다소 기만적인 항목이다. 진정한 기준은 '지능'이다. 이 점에서 영은 자신이 해부하려 한 이데올로기에 너무도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말았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노력'이라는 허깨비 같은 항목을 통해 진실을 가리는 명칭이다. 진짜 이름은 '지능주의'다.

<능력주의>에서 '능력 있는 자'는 노골적으로 IQ 테스트를 통해 선발된다. 너무 조야한 체제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껏 존재한 모든 근대적 시험 제도는 이 IQ 테스트의 복잡한 변주일 뿐이다. IQ 테스트를 십수년의 공식 교육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더 세련되게 만들고, 마치 '노력'이라는 변수도 함께 검증되는 양 설계해 정당성을 높인 것일 따름이다. 결국은 '지능'이라는 기준을 통해 선별된 자들이 정한 그 '지능'이라는 기준으로 모든 인간을 분류, 배열하는 체계다.

역사상 이 기준을 상대적으로 쉽게 충족시킬 수 있었던 인간 군상을 우리는 '지식인-중간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을 기준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아온 이들의 역사적 명칭이 그러하기에 '지식인'이며, 바로 그 능력을 통해 사회의 밑바닥에서 맨 위를 향해 상승 운동을 벌이곤 하기에 일단 '중간층'이다. 쇼가 "5% 프롤레타리아"라 하면서 염두에 둔 집단이 이들이며, 실은 쇼 자신이 이들의 일원이다. 영의 <능력주의>는 이들 지식인-중간층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산시키며 그것이 관철된 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사회적 주체라 지목한다. 물론 이렇게 분명한 명제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가 등장시키는 이들, 가령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하위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야심찬 자녀들,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 졸업장을 따낸 이들을 '일반화'하면, 지식인-중간층 정도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평등주의가 곧 능력(지능)주의이며, 이들이 마이클 영이 그린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이든 아니면 우리가 실제 사는 우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현존 체제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때에 능력주의 사회가 열린다.

우리의 우주에서는 이들이 <능력주의> 속 가상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말고도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중에는 토마 피케티가 만들어낸 '브라만 좌파'라는 명칭도 있고, "우리 모두 능력주의자가 되자"고 너무도 적나라하게 외쳐서 마이클 영에게 호통을 들은 토니 블레어 같은 '사회적 리버럴(social liberal)'들도 있다.

그럼 마이클 영의 대체 역사물 말고 현실 역사에서 지식인-중간층은 어떻게 새로운 불평등사회의 승자 동맹에 낄 수 있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이들에 해당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또한 능력주의의 담지 세력이 지식인-중간층이라는 사실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지면에 올릴 다음 글에서는 이 물음들에 대해 내 나름의 답을 찾고자 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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