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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정의로운 경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탈성장의 세 가지 길 그리고 시민의 힘

화석연료 교체 넘어 생산시스템도 변화
  • 입력 2021.10.20 10:57      조회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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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대처를 위해 뭘 바꿔야 하나?

“기후가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자(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

많은 기후정의 운동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다. 같은 이름의 단행본 책도 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직관적이고 명확하다. 지금의 사회경제시스템을 미래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다면 기후위기를 심화시켜 종래에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후를 안전한 수준에서 보호하고 안정화시킬 수 있도록, 기후가 아니라 차라리 지금의 사회경제시스템을 바꿔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사회경제시스템은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래서 곧바로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그 많은 시스템 중에서 어떤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인데?”

지금 정부와 기후정의운동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2030년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바꾸는 것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인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는 바꿔야 할 시스템의 작은 목표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기존 경제산업 시스템’을, ‘탈-탄소기반의 경제산업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변화(change)’가 긴급하다. 그렇다. 우리가 바꿔야 할 시스템은 무엇보다 ‘화석기반 산업시스템, 도시시스템, 생활시스템’이 아닐까?

우리 산업시스템에서 석탄, 석유, 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제거하는 것은 마치 건물에서 주춧돌을 제거하는 것과 같이 근본을 흔드는 엄청난 전환이다. 그것도 단시간 안에 화석연료 기반 산업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결코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산업계가 기를 쓰고 2030년 탄소배출 40%에도 저항하는 것은 틀림없이 괜한 엄살은 아니다. 일부 기후운동들이 ‘겨우 그 정도만 바꾼다고?“ 하고 폄하할 만큼 화석연료를 우리 삶에서 제거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도 아직 이를 실천하기는커녕, 가능한 전환 경로조차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을 정도다.
 

기후위기 주범은 기업들의 끝없는 팽창욕구?

그럼에도불구하고 이게 우리가 바꿔야 할 시스템 변화의 전부인가? 사실 산업과 교통, 주거생활에서 화석연료를 제거하고 재생에너지로 ‘시스템을 바꾸자’는 주장은 녹색성장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동의할 만큼 폭넓은 공감대가 있다. 그런데 이른바 생태경제 또는 탈성장(degrowth)론은 여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강력히 비판한다. 설사 재생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하더라도 경제와 소비를 계속 확장해나가는 한, 기존 화석연료에 더해 재생에너지까지 소비가 확장될 뿐이라는 것이다(제번스 효과). 혹시나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계속 확대되는 수요를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막대한 자원과 희귀금속을 조달하느라 환경은 파괴되고 탄소배출이 더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지구의 한계 처리량 초과).

결국 산업시스템을 바꾸는 것과 더불어서, 경제시스템의 무한팽창 관성 즉, 즉 성장주의(growthism)에서 벗어나 지구의 한계 ‘처리량(throughput)’ 안으로 자원사용을 제한하는 시스템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복리적인 무한성장을 포기해야 하고 그 상징으로 GDP성장목표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탄소배출뿐 아니라 자원과 에너지의 총소비, 자동차 대수 등을 제한하고 필요하면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먼 데일리나 팀 잭슨 등 많은 생태경제학자들의 주장이 여기에 닿아있다.

그런데 제이슨 히켈이나 다른 탈성장론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추가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정책의 중심에서 성장 목표를 빼버리고, 각종 규제와 제도를 동원해서 총허용 자원량을 국가가 통제하기만 하면 될까?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플레이어들인 기업들이 투자 대비 이익률을 매년 복리로 끌어올리려 사투를 벌이고, 여기서 탈락하면 기업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내버려둔 채로, 국가가 자원 사용 총량을 정책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여기서 히켈은 ‘무한축적을 본성으로 하는 자본’을 그대로 두고서 성장주의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고전적 논지를 되살린다. 히켈이 생각하는 시스템 변화는 기후를 구하기 위해 그냥 ‘탈-탄소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를 ‘포스트자본주의’로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된다.
 

‘공동체가 관리하는 공유자원(commons)’이라는 대안

문제는 ‘포스트자본주의’가 뭐냐 하는 질문이다. 이 대목에서 히켈의 대답은 모호한데, 섣불리 사회주의라고 단정하는 것을 피하면서 일련의 정책 목록으로 새로운 시스템 내용을 대체한다. 예를 들어 부자에게 과세하고, 일자리보장제를 실시하며, 주4일제 노동을 도입하며, 부채를 탕감하고, 상업은행의 신용화폐를 없애버리는 것이 기후위기에도 좋고 불평등 해소에도 좋을 것이라는 식이다. 여기에는 자본의 축적을 부정하지만 자본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 모호함이 숨어있다. 일단 이것을 탈성장의 첫 번째 버전으로 분류해 보자.

1987년생 일본 소장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는 이런 모호함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무한축적을 본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을 대체할 새로운 생산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중세 봉건제가 근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붕괴되어 버렸던 두 가지 시스템을 새롭게 복원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나는 이른바 울타리치기(enclosure)라는 방식으로 무너진 공유지(commons)였고, 다른 하나는 중세 농촌과 도시의 사회 하부구조였던 공동체들(communities)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 두 가지를 중세인들에게서 박탈함으로써 꼼짝없이 그들이 노동력을 팔기 위해 공장으로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도록 했다고 분석한다.

사실 자본주의 시스템에 가장 대척점에 섰던 20세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해 이미 무너진 공유자원이나 공동체 복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고헤이가 보기에 과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중심 플레이어인 기업의 주인을 사적 개인이나 주주로부터 국가로 바꾸는 시스템 전환을 통해서,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분배도 평등화하여 풍요를 누릴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사회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무한성장’이라는 본성을 버리지 못한 채 자본주의와 똑같이 환경파괴를 자행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성장 경쟁에서 패배하자 금방 무너졌다는 것이다.
 


21세기에는 과거 ‘자연이라는 공유자원’에 더해서 지식, 그리고 에너지와 인터넷 등으로 공유자원의 포괄범위를 넓히고 이를 공동체가 운영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 고헤이의 시스템 변화다. 공동체가 운영하는 새로운 공유자원 모델은 “시민전력회사와 에너지협동조합이 설립되어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방식의 생산시스템으로 구현된다. ‘고작 협동조합 만들자는 거야’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생산방식 대체하는 새로운 ‘탈성장 생산 시스템’의 단서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사점을 주는 탈성장의 두 번째 버전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물론 현실에서는 공유자원을 관리하는 협동적 조직이 자본주의 기업 생산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다 좋은데, 10년 안에 시스템을 전환시키려면 국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이토 고헤이의 버전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약점은 남아있다. ‘치열한 경쟁 속의 무한축적 자본’을 대체하는, ‘공동체가 운영하는 새로운 공유자원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직관적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점진적 과정일 것으로 보인다. 분권적이고 버텀업 방식이 늘 그렇듯이 이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88년 IPCC가 조직되면서 기후위기를 대처하자고 한 이후, 30년 넘게 시간을 허비한 탓에 지금은 10년 안에 결정적으로 탄소배출을 줄여야 할 만큼 ‘비상사태’이다. 위기적 수준이 너무 광범위하고 시간적 여유가 매우 적은 상황에서 대규모 전환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른바 ‘전시수준’의 사회적 동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고헤이의 모델은 무력하기만 하다.

물론 그도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인을 한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과제가 전시 수준의 긴급성을 가지고 해야 한다면 어떤 해법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이 대목에서 스웨덴의 맑스주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은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에 대처했던 경험을 살려서 중요한 대안을 제안한다. 기후위기는 ‘비상사태 아래에서의 비상행동’이 필요한 사안이고 이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서 ‘비상조치’방식으로 풀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름은 매년 “8퍼센트 (온실가스) 감축을 달성하려면 포괄적이면서도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모두가 이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당연히 우리는 자발적 수요중단이나 여행 중단에 의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이행기 내내, 한 종류의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계속해서 대체되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국가’만이 유일하게 ‘전시공산주의’ 수준의 추진력과 동원력을 발휘함으로서 이 모든 비상행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 ‘코로나19 비상조치’ 경험이 알려준 것이란다. 물론 국가를 전복함으로써가 아니라 민주적 압력으로 국가가 비상행동에 나서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을 탈성장의 세 번째 모델이라고 불러보자. 이 모델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점진적 방법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의 느슨한 공동체적 해법을 모두 거부하고 ‘전시공산주의’ 수준의 국가적 조치에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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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떤 해법이 진정으로 기후는 그대로 보호하면서 우리의 사회경제시스템을 바꾸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모두 참조해야 할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화석연료 기반의 경제와 산업을 탈-탄소 경제와 산업으로 바꾸는 것은 기후위기 대처의 필수 요소다. 일부 기후운동가들이 생각하듯이 절대 간단한 전환이 아니다.

둘째, 에너지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지구가 견딜 수 있는 투입량과 배출량 총량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GDP팽창 중심의 국가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셋째, 그러나 애초에 성장주의를 촉발시킨 기업의 무한팽창 본성을 그대로 두고서 국가의 거시정책만을 바꾼다고 팽창이 멈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유자원과 공동체를 새롭게 복원하여 적어도 필수산업 영역등은 ‘필요’이상의 과잉팽창이 일어나지 않도록 생산시스템을 바꿀 필요도 있다.

넷째,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가 바꿔야 할 시스템은 거대하지만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바꿔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비상적 동원이 필수적이다.

그래도 마지막 한 가지가 남는다. 누가 국가를 비상조치에 나서도록 만들 것인가? 그 결론은 한결 같은 것 같다. 시민들이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도 이렇게 매듭짓는다. “냉소주의를 버리고 99퍼센트의 힘을 보여주자. 그러기 위한 열쇠는 3.5퍼센트의 사람들부터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다. 그 행동을 커다란 물결로 만들면, 자본의 힘을 제한하고 민주주의를 쇄신해서 틀림없이 탈탄소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글은 레디앙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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