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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경제] 혁신경제의 한계와 더 나은 전망을 찾아서

누가 혁신의 주체인가? 모두를 위한 혁신경제의 길은 없나
  • 입력 2021.11.16 13:27      조회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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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경제는 어떻게 보수화되었는가?

선거철이 되니 정치인들이 ‘혁신경제’와 ‘미래경제’를 자신들의 상징적 경제정책으로 또다시 자주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혁신경제는 대체로 보수의 경제비전이자 정책의제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도 초기에 진보적 성향을 보였을 때에는 혁신경제보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강조하더니만, 이후 혁신경제로 자신들의 경제정책을 브랜딩하면서 급격히 보수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정말 혁신경제는 보수정책이기만 한 것인가? 통상 보수적인 경제관점은, 자본투자를 독려하고 경쟁력 있는 제품생산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경제를 살리는 길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공급역량을 우선시한다는 것인데, 반면 ‘공급은 그 자체의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세이의 법칙(Say’s Law)에 따라 상대적으로 수요에는 방점을 찍지 않는다.

문제는 혁신의 주체를 ‘혁신적인 기업가’로 한정할 때, 대체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의 자율적 수익추구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거나, 스타트업 지원, 지적재산권의 강력한 보호 등 기업에 대한 직, 간접적 지원으로 기업 활동을 국가가 뒷받침하는 경제 모델이 혁신경제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규제완화도 ‘규제혁신’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스타트업에 대한 세금감면이나 자금지원은 ‘혁신활동 지원’으로 윤색된다. 보수경제정책들은 이렇게 혁신적인 정책들로 둔갑하는 것이다.

혁신적 기업가(entrepreneur)를 혁신의 주요한 플레이어로 내세우면서 혁신이 경제 발전의 주요 동력임을 제창한 학자는 잘 알려진 조셉 슘페터다. 그런데 적어도 슘페터가 염두에 둔 혁신적 기업가는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스타트업 백만장자들하고는 결이 많이 다르다. 슘페터의 기업가는 자본가나 단순관리자와 달리 새로운 결합을 통해 전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창조해내는 행위자다.

슘페터식 기업가는 “자기 행동의 쾌락적 성과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는 따로 이루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창조한다. 그는 획득한 것을 향락하고 즐기기 위해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소원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활동선상에 있는 정거장에 잠깐 멈춘 것이 아니라, 그의 마비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자기 사명의 수행이 아닌 육체적 사멸의 징후다.” (<경제발전의 이론> 중에서)

그러나 최근 혁신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수많은 디지털 플랫폼은, 슘페터가 기대한 ‘역마차에서 기차로 도약하듯이’ 진정하게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른바 ‘타다’ 모델처럼 규제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이윤을 취하는 규제차익(regulatory arbitrage)을 추구한다. 또는 플랫폼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수많은 플랫폼 기업들처럼, 노동을 고용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사회보험 등)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비용의 사회화를 통해서 이윤을 추구하려고 한다. 이를 두고 라이더유니온 박정훈 위원장은 “현대 경제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경제 주체는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되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오직 기업가만이 혁신가로 불릴 수 있나?

이처럼 현대 스타트업 기업가들 중 많은 이들이 슘페터적 창조적 파괴자들이기보다는, 주식 대박을 노리고 규제차익이나 비용전가의 빈틈을 찾는데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차지하고도,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있다. 경제활동의 주체는 기업가만이 아닌데, 도대체 왜 기업가만이 혁신의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수많은 연구들이 ‘노동자의 집단적 혁신활동’이 기업가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해왔다. 노동자들의 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임금을 높게 준다든지, 종업원지주제와 같이 참여적인 기업구조를 만든다든지 하는 방안들도 많이 논의되었다. 다만 기성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관계없이, 줄이면 줄일수록 좋은 것으로 노동을 인식하는 풍조가 최근 매우 강력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진정으로 직원들의 혁신역량을 고무하도록 하는 조치들에 대해서는 주목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

한편 경제활동의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지역공동체들까지도 혁신의 플레이어로 평가해볼 수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지방정부들을 중심으로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이라는 정책이 주목을 받았는데, 주로 ‘공동체의 혁신역량’을 주목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공공기관들이 기업의 경영모델을 흉내내거나 아예 기업들에게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혁신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역에서 그런 방식이 주민생활의 혁신을 크게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수익성이 없어서 시장(market)이 외면하고, 구체적인 주민 삶을 일률적인 잣대로 재단해온 행정이 무시해왔던 주민들의 절실한 필요들에 대해, 오직 지역공동체들만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해법을 만들어왔던 전통이 부활하고 있다. 주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역공동체의 혁신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오세훈 시장이 지역공동체의 혁신활동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혁신의 중요한 한 축을 거세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기업가, 노동자, 공동체와 함께 또 하나의 강력한 혁신 플레이어로서 국가의 역할을 놓칠 수 없다. 최근까지 국가에 대한 총체적 불신, 공공에 대한 과소평가가 만연한 탓에 ‘기업은 좋은것이고 정부는 나쁜 것(entrepreneurs good, government bad)’라는 고정관념이 강력히 작용해왔다. 이런 환경에서 국가의 혁신적 역할이라는 주장은 들어설 여지도 없었다.

“정부 자체가 스스로를 기껏해야 촉진자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시장과 부를 함께 창출하는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알아서 잘 돌아가는 시장 시스템을 옆에서 촉진하는 역할만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식이 정부 비판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로 그 정부, 즉 무능한 정부를 만든다.” (<가치의 모든 것> 중에서)
 


표1. 국가 재정과 혁신 역량에 관한 미신
 

하지만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는 아이폰에서부터 최근 백신 개발까지 풍부한 사례를 예시하면서 , 국가가 “산업과 투자의 미션과 방향을 제시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의 기초를 축적하는 미션 지향적 혁신(Mission-oriented Innovation)”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는 시장 실패의 교정자나 공평한 중재자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공동 창조자, 새로운 시장의 창조자, 위험의 감수자로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 시대를 맞이해서 국가는 탈-탄소 전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전망을 보여주는 ‘혁신의 방향 제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마추카토는 강조한다. 그래서 시민들도, 시장의 기업들도 탄소 집약형 산업에 더는 집착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야 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해주어야 할 역할이 국가에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화석연료 기반의 20세기 문명을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개별적 기술뿐 아니라 전체 생산, 분배 소비의 전체 산업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진정한 혁신이 될 것이기에 국가의 역할은 한층 중요해진다. “’녹색 방향’은 단지 재생에너지 전환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부문의 새로운 생산, 분배, 그리고 소비체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린뉴딜 정책을 설계하면서 민간 ‘뉴딜펀드’모집에 연연해 하는 문재인 정부의 녹색전환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관점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주4일제는 혁신의 성과를 공유하자는 얘기다

이처럼 혁신의 플레이어를 기업가로 국한하지 않고 노동자와 지역공동체, 국가로까지 확장하는 순간 혁신경제는 보수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마추카토는 혁신과 분배를 연결하려고 시도한다. 사기업만이 유일한 가치 창조자이고 국가는 기업이 창출한 가치의 일부를 세금으로 편취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잘못이라면, 즉 사기업과 정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분배도 의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공동으로 혁신하고 그 결과로 창조된 가치라면 공동으로 가치를 분배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공약으로 제기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주4일제’도 마찬가지다. 주4일제는 형편이 좋은 공기업이나 대기업들이 직원 복지 차원에서 베풀어주는 시혜가 아니다. 혁신의 성과를 기업의 이윤으로만 독점하지 말고, 노동자도 ‘더 많은 여가’로 혁신의 성과를 나누자는 것이다.

미래학자이자 컨설턴트인 알렉스 수정 김 방(Alex Soojung-Kim Pang)은 저서 <쇼터(Shorter)>라는 책에서, 그동안 “대부분의 기업에서 효율성을 높여 창출되는 가치는 직원이 아닌 소유주에게 돌아갔다”고 비판한다. 그는 “근무시간 단축은 직원들에게 생산성 향상에 따른 혜택을 즉시 누리게 해주는 사회적 계약”이어야 한다면서 주4일제가 기업의 시혜가 아님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주4일제가 그냥 노동시간을 줄이는 문제가 아니라 업무수행방식, 사고방식, 문제해결방식 등 모든 직장의 패턴을 혁신하는 것과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불필요한 회의를 대폭 혁신한다든지, 각 직원들에게 고도의 집중시간을 최대한 보장해준다든지 하는 다양한 변화를 수반해야 주4일제가 안착할 수 있으며 이는 직원들의 참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단다. 주4일제는 혁신과 생산성 향상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혁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주4일 근무제는 주말을 3일로 굳히는 개념이니만큼 매력적이지만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기업은 가뜩이나 바쁜 직원에게 스스로 업무수행 방식을 다시 생각하고, 회사에 실존적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제도를 추진하면서 동료와 더불어 일하고 동료를 다루는 방식을 다시 고안하라는 개인적 과제를 부여한다.“

다양한 진보적 경제관점이 모여야 미래전망이 가능하다

이렇게 경제활동 주체들이 모두 나름의 혁신적 역할과 가치 창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혁신의 성과가 공유되는 혁신경제라면, 혁신경제가 공급을 중시한다고 해서 더 이상 보수의 경제정책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장 강력한 진보적 전망으로 혁신경제는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진보적인 경제비전과 정책은 이제 하나의 이론적 토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득주도성장처럼 전통적으로 포스트케인지언의 다양한 조류나 제도주의 정책들이 진보 경제정책에서 활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앞서 혁신국가론을 주창해온 네오 슘페터리언 주장들도 진보적 경제비전을 설계하는 중요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여성들이 주로 담당해온 무급노동을 포함하여 젠더 편향적인 경제활동이나 노동시장 정책들을 바로잡아줄 페미니스트 경제관점이 진보 경제정책 안에 보강되어야 한다. 나아가 지구의 생태적 한계 안에서의 경제활동이라는 생태경제로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이는 기후위기 대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태경제학의 토대가 필요해진다. 이처럼 다양한 경제적 접근법이 서로 보완하는 가운데 더 나은 진보적 경제비전은 조금 더 현실속에서 힘을 얻을 것이다. 진보적 성격을 가진 혁신경제도 그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레디앙'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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