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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브라질뿐만 아니라 만년 우파 집권국 콜롬비아에서도

MZ세대 대통령 탄생, 지구 반대편에서 2차 '좌파 붐'이 전개되고 있다
  • 입력 2022.01.05 16:30      조회 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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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19일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정당연합 '존엄을 인준하라' 소속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극우파 호세 카스트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이로써 칠레에는 피노체트 군부독재의 경제사회적 유산과 타협하던 기존 사회당-기독교민주당 세력보다 더 왼쪽에 선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선거로 집권했으나 1973년 쿠데타로 무너진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의 맥을 잇는 정부의 출현이며, 2019-2020년 대중항쟁으로 시작된 새 헌법 제정 절차에 날개를 달아주는 칠레 민중의 선택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중남미 대륙 전체를 놓고 봐도 중대한 사건이다. 2000년대에 중남미 각국에서 좌파 세력이 연쇄 집권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좌파 붐' 혹은 '분홍색 물결'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흐름은 2010년대 들어 우파, 그것도 극우파 집권 붐이라는 반격에 자리를 내주는 듯 했다. 특히 2016년에 지역 내 최대국 브라질에서 노동자당(PT) 소속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받아 물러나자 좌파의 패배, 극우파의 승리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된 듯 보였다.

지금 이것이 다시 정반대 추세로 바뀌고 있다. 사회주의운동당(MAS) 소속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났던 볼리비아에서는 모랄레스의 후계자 루이스 아크레가 2020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20년 전에는 정작 좌파 붐에서 비껴 있던 페루에서도 작년에 급진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대륙에 다시 한 번 분홍색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2000년대보다 더 강력한 것 같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지역 내 또 다른 대국 멕시코에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애칭 암로AMLO)이 이끄는 좌파 성향 정부가 들어서 있다. 암로의 멕시코는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다시 집권한 아르헨티나와 함께 미 제국 남쪽에서 제국에 종속된 운명을 거부하는 세력들의 두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좌파 붐의 또 다른 고리인 칠레에서는 대중운동의 활기로 무장한 신진 좌파가 '분홍색 물결'을 더욱 붉은 색에 가깝게 만들고 있다.

이 흐름은 새해에도 계속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2000년대 좌파 붐을 오히려 예고편으로 만들어 버릴 대변화의 해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올해에 대선-총선을 앞둔 두 나라,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민중에게 그 답이 달려 있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만년 우파 집권국 콜롬비아에서도

브라질에서는 10월 2일에 대선이 있다. 연방 대통령뿐만 아니라 연방 하원의원도 뽑고, 주지사, 주의원도 선출한다. 브라질 사회의 지형을 크게 바꾸는 그야말로 '총'선거다.

한데 대선 결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위기다. 어느 여론조사 결과를 보든 노동자당의 룰라 전 대통령이 대선 주자 가운데에서 압도적인 1위다. 지지율이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의 두 배 이상이다. 그러니 결선투표에서 둘이 맞붙을 경우의 판도도 보나마나다. 브라질과 아시아 어느 나라 축구팀이 겨룰 때처럼 결과가 너무 빤하다.

왜 이렇게 됐나? 이미 언론에도 많이 보도된 것처럼,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극우파 보우소나루 정부의 실정이다. 대통령이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AIDS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가짜 뉴스나 소셜 미디어에 퍼 나르니 코로나 대응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정부의 무능과 방조로 브라질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팬데믹의 최대 피해국이 되자 사법 당국의 대통령 수사가 시작됐고 의회는 다시금 탄핵 준비에 들어갔으며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반쪽만을 설명한다. 보우소나루의 추락은 설명해도 하필 룰라 전 대통령이 그 대안으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룰라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은 한때 비리 혐의로 투옥되기까지 했던 룰라가 작년 봄에 연방 대법원에서 유죄판결 무효 결정을 받으면서였다. 물론 룰라가 선거 출마 자격을 되찾아서 지지율이 오른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룰라에게 쏟아진 비리 의혹이 대부분 근거 없음이 밝혀진 데 대한 대중의 화답이기도 하다.

룰라의 투옥도, 호세프의 탄핵도 이렇게 온통 의문투성이인 사건들이다. 노동자당, 공산당(PCdoB), 사회주의자유당(PSOL)만 빼고 상하원 내 모든 정당이 갑자기 거국연합을 결성해 노동자당 장기 집권을 만 14년으로 강제 종료시켜 버렸지만, 여러 모로 무리한 음모였고 더군다나 대안조차 준비되지 못한 파괴 행위였다. 노동자당 정부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막상 기득권 정당 중 어디에도 대선에서 노동자당 후보를 이길 카드가 없었다. 덕분에 군부 쿠데타를 찬양하던 괴짜 극우파 보우소나루가 돌연 유일한 선택지로 부상했고, 그 결과가 지금 브라질의 이 바이러스 참극이다.

이런 사정을 놓고 볼 때, 올해 브라질 총선에서 룰라와 노동자당 및 그 연합 세력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억지 탄핵까지 관철시킨 브라질 기득권 세력이니 중간에 또 뭔 짓을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현재 분위기는 그렇다.

이런 브라질 상황은 중남미의 제2차 좌파 붐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멕시코, 아르헨티나에 이어 인구 2억의 브라질에도 좌파 정부가 들어선다면, 한때 대반격을 겪었던 분홍색 물결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하게 부활했음이 한층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룰라 제3기 정부가 과거의 노동자당 정부보다 훨씬 더 급진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브라질의 지정학적 위상이다. 2000년대에도 그랬지만, 브라질의 정권이 어떤 색깔인지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선택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때에도 브라질에 룰라 정부가 있었기에 베네수엘라의 실험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 볼리비아에서도 쿠데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2020년대의 브라질 룰라 정부도 최소한 이 정도 역할을 할 것이다.

한데 제2차 좌파 붐이 제1차보다 더 강력해지리라 전망하는 것이 단지 브라질 때문만은 아니다. 또 한 나라가 더 있다. 바로 콜롬비아다.

콜롬비아. 제1차 좌파 붐 와중에도 중남미 우파의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던 나라. 우리에게는 이미 전설이 된 끔찍한 마약상들을 그린 영화나 TV 드라마로 더 잘 알려진 나라. 최근까지, 아니 사실은 지금도 밀림에서 정부군과 마약 카르텔, 좌파 게릴라, 극우 민병대가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모를 이전투구를 거듭하는 나라.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극우 깡패의 협박을 받아 망명을 떠나야 했던 그 나라 말이다. 바로 이 콜롬비아도 3월 13일에 총선을 실시하고 두 달 뒤인 5월 29일에는 대통령을 선출한다.

한데 두 선거를 앞둔 콜롬비아의 여론조사 결과들이 심상치 않다. 좌파 정치세력들이 모여 만든 정당연합 '역사적 협약'의 구스타보 페트로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린다. 페트로는 2018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까지 가서 이반 두케 현 대통령과 맞붙었던 인물이다.

한편 총선 결과를 예고하는 정당 지지율 조사 결과에서도 '역사적 협약'이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2위 역시 우파가 아니라 녹색당 등이 결성한 중도좌파 성향의 '희망 연합'이다. 마치 칠레처럼, 지금 콜롬비아에서도 몇 세대에 한 번 있을만한 커다란 변화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콜롬비아 - 칠레처럼 대중투쟁을 기반으로 체제 교체를 향해

콜롬비아 정치는 2000년대 초까지도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전통적 양대 정당이 양분하고 있었다. 저 멀리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에 총 들고 내전까지 벌였던 두 당은 1960년대부터는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부패한 정치 체제를 공동 관리했다. 1960년대에 좌파 게릴라 활동이 시작된 것도, 1980년대에 메데인과 칼리, 두 전설적인 마약 카르텔이 부상한 것도 다 이러한 부패한 양당 독점 정치 아래에서였다.

그러나 양당 독점 체제는 중남미 다른 나라들에서 좌파 붐이 일던 그 시기에 서서히, 아주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자유당 출신이지만 보수당의 극우 이미지를 빼앗으며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 알라보 우리베(2002-2010년 대통령 역임)가 보수당이 차지하던 정치 공간을 차지하면서 양당 독점 구도의 구심력에 변화가 일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당세는 급격히 위축됐고, 선거 때마다 의회 내 기득권 정파의 합종연횡이 거듭됐다.

이런 기성 세력의 자중지란만 변화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 변화를 더욱 앞당기려 한 노력들이 있었다. 원내 소수파이지만 대선에 계속 제3후보를 내 만만치 않은 지지를 받은 정치세력들이 있었다. 좌파 게릴라 중 제2의 세력이었다가 1980년대 말에 합법 정치 활동으로 전환한 '4월 19일 운동'의 후신 격인 '대안민주기둥'(PDA, 이하 대안민주기둥당)이 그런 세력이고, 녹색당도 비슷한 활동을 펼쳤다.

페트로 후보도 대안민주기둥당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1960년생인 그는 불과 18살의 나이에 '4월 19일 운동'에 합류해 무장 투쟁을 벌였고, 이 때문에 18개월간 감옥살이도 했다. '4월 19일 운동'이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에는 지방의원부터 시작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마침 전통적 양당 정치가 흔들리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 그는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정치가로 부상했다. 2002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옛 게릴라 동지들과 협력해 대안민주기둥당을 창당하는 데 앞장섰고, 언론에서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더 알린 것은 마약상들과 결탁한 우리베 정부의 부패에 맞선 목숨을 건 폭로전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목숨을 건'이라는 말은 결코 허세나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마약 카르텔의 협박도 페트로의 행보를 막지는 못했다.

페트로는 여세를 몰아 2010년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대안민주기둥당 경선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는 당 내 주류보다 더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을 주창하며, 잔존 좌파 게릴라와의 평화 협정을 통한 내전 종식, 조직범죄 근절, 사법부 부패 청산, 토지 개혁 등을 주창했다. 이변을 일으키며 대선 후보로 선출된 그는 본선에서는 9.1%를 득표했다. 이 성과를 발판으로 페트로는 수도 보고타 시장에 당선됐고, 2010년대의 많은 시간을 우파 중앙정부와 대결하며 자신의 개혁 공약을 실현하는 데 보냈다.

그 사이에 당적도 바뀌었다. 대안민주기둥당 내 주류의 온건 노선과 빈번히 충돌하던 그는 결국 탈당하여 독자 조직을 결성했다. 2018년 대선에서 이 조직의 이름은 '진보 운동'이었고, 지금은 '인간적인 콜롬비아'이다. 이 조직이 좌파 게릴라 '콜롬비아 혁명군'(FARC)의 후신인 합법 조직 '커먼스', 콜롬비아 공산당, 대안민주기둥당 등의 다른 좌파 정치세력들과 함께 만든 정당연합이 '역사적 협약'이다. 전에는 함께 모이기 거의 불가능했던 세력들이 페트로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아니, 페트로 덕분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콜롬비아에서 계속된 치열한 대중투쟁이다. 2018년 대선에서 변화의 열망이 확인됐지만 실현은 되지 못한 뒤에 민중은 투표소가 아닌 거리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을 계속했다. 칠레에서 대중항쟁이 일어난 것과 같은 때인 2019년 말-2020년 초에 콜롬비아 혁명군과의 협상에 미온적인 두케 정부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가 벌어졌다. 이 운동은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2021년 4월에 간접세 인상과 의료 사유화 따위를 포함한 두케 정부의 사회'개혁'안에 맞서며 다시 폭발했다.

두 항쟁 모두 폭력 진압 탓에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2019년에도, 2021년에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 격랑 속에서 페트로가 속한 정당 '인간적 콜롬비아'는 거리의 민중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입장을 취했다. 현재 페트로 후보의 핵심 공약인 공공의료 확대, 금융 공공성 강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에너지 전환, 토지 개혁 등은 지난 몇 년간 거리에서 시민들이 외친 요구들이다. 대중투쟁의 열기를 바탕으로 기성 정치를 뒤엎으며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로 나아가려는 이러한 몸부림은 안데스 산맥 반대쪽 끝에 자리한 나라, 칠레의 최근 모습과 판박이다.

우리와 같은 위기의 시간 속에서 같은 과제에 도전하는 그들

이것이 올해에 중대한 선택의 순간들을 맞이한 중남미 대륙 상황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소식을 전하면, 으레 따라붙는 반응이 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는 우리의 참고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더 심하게는, 한국보다 못한 나라의 사례를 왜 마치 모범처럼 소개하느냐는 반문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서유견문'의 시간대에 갇힌 사고일 뿐이다. 남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그게 꼭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전범이어서가 아니다. 배우기로 따지면, 남에게서는 아예 배울 수 있는 게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모두가 모두에게 배워야 하는 법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다만, 이제 지구 위의 모든 이들이 같은 위기의 시간을 살며 같은 과제를 풀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칠레의 보리치 당선자가 약속한, 그리고 콜롬비아의 페트로 후보가 공약하는 핵심 정책 중 하나는 기후 위기에 맞서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고, '에너지 전환'이라는 이름 아래 북반구 국가들이 남반구에 강요하는 자원 추출 중심 경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보우소나루 시대의 종말을 열망하는 이들의 최대 악몽은 지금도 목장을 넓히기 위해 불타고 있는 아마존 열대 우림이며, 룰라의 당선이란 그 우림을 그나마 성실히 지켰던 정권의 복귀를 뜻한다. 이것은 브라질만이 아닌 지구의 허파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저들의 과제는 곧 우리의 과제다. 우리는 공동의 운명 속에서 함께 좌절하며, 다시 함께 전진한다. 그렇기에 라틴아메리카의 두 번째 분홍색 물결은 '우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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