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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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한반도 적대적 갈등구조의 평화적 전환과 남북한 상호승인
- 입력 2023.09.15 14:27 조회 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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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상 서울연구원 초빙부연구위원, 전 민주노동당 평화군축운동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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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평화군축운동본부장, 정책위 부의장을 거쳐 진보신당 정책위 부의장, 상상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다. 2018년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남한정부의 한반도냉전해체전략 연구”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 통일정책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정의정책연구소 비상임연구위원으로 있다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을 거쳐 현직에 재직 중이다.
1. 들어가는 말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지는 73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한국전쟁이 만들어 놓은 적대적 갈등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한반도의 적대적 갈등은 새롭게 강화되고 있다. 30년 넘게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한 북핵 문제와 최근 본격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이 한반도의 전쟁질서를 재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남북한의 공존과 호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힘을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적 해법을 핵심정책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동맹네트워크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 과연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인가? 과연 우리는 그런 현실주의적 해법을 넘어서는 평화전환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2. 한반도의 적대적 갈등구조의 재강화
1) 하노이 노딜과 북핵 협상의 교착상태
지금 남한이나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북한도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은 계속되고 있고, 핵무기를 매개로 한 북한의 ‘정면 돌파’도 계속되고 있다. 미·중 갈등과 미·러 갈등은 한반도의 적대적 갈등을 세계적 차원의 국제정치 역학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다.(주 : 소위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대결 움직임은 바로 그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구냉전과 유사한 신냉전의 고착화를 의미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필자는 현상적으로는 유사해 보이더라도 신냉전으로 단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그것은 미·중패권경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미국의 단일패권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중국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주도의 규범질서를 유지할 것이냐 미·중을 포함한 여러 강대국의 공존적 규범질서로 수정할 것이냐가 갈등의 핵심쟁점이라고 본다면 미·중패권경쟁이라는 말도 적절하다고 할 수는 없다.)
2019년 하노이 노딜은 미국과 북한의 핵협상이 어느 지점에서 막혀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북한은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종류와 규모, 핵시설의 존재 전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북한의 핵폐기 의지가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화하기 전에는 제재해제나 진전된 대북안전보장을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주 : 당시 미국이 왜 노딜을 선택했는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볼턴의 강경론이 주도했다기보다는 코언 청문회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 미 국무부 관료들의 뿌리 깊은 대북 불신, 야당인 민주당의 스몰딜 반대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준 것이 바로 국무부 관료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노딜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노이 노딜이 미국 정치권과 관료들의 초당적 합의물이라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는 말뿐이었고, 미국은 사실상 북한의 선비핵화를 앞세웠다.
하노이 노딜 이후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한 기회의 창이 닫혔다. 미국은 스몰딜(주 : 스몰딜(small deal)은 남한이 북한 및 비건 등 미 국무부 협상파들과 조율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다. 소위 영변 핵시설에 국한된 교환방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미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확정하지 못했고, 상호신뢰를 구체화할 수 있는 1단계 조치조차 명확하게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설득력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에 합의하지 않았고, 북한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북한과 남한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스몰딜을 통해 한반도평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었던 문재인 정부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접었고, 남한의 역할한계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 바이든 정부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2.0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주 : 바이든 정부는 여전히 협상을 통한 논의, 외교적 해법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추가적 협상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북한이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정책과 대동소이하다.) 북핵 문제가 우선순위가 아니므로 북한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활용해서 남한 정부를 대중 압박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견제하는 힘을 강화하려고 한다. 한미 핵협의그룹(NCG) 구성, 한미일 군사협력의 제도화, 쿼드(QUAD)와 나토(NATO)의 연결을 통해 세계적 차원의 동맹 안보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한다.
북한도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낼 새로운 카드가 없다. 7차 핵실험은 대북제재를 더 강화할 뿐이고, 중국-러시아도 불편해할 수 있어서 쉽게 단행하기 힘들다. 대신 북한은 핵보유국 기정사실화와 핵무력 강화, 자력갱생, 정면돌파전략을 천명하면서 북·중·러 협력 구도 강화에 진력하는 모습이다. 북한은 미·중 갈등, 미·러 갈등이 신냉전의 고착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북한 생존의 유리한 환경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주 : 『노동신문』, “위대한 우리 국가의 부강발전과 우리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자,” 2023.1.1.)
윤석열 정부는 미국보다 더 강하게 북한을 압박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스스로 대북 개입력을 차단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대미 편승정책으로 구체화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강화, 한미일 군사협력 확대, 미국의 전 세계적 동맹질서에의 참가 등으로 나타났다. 문제의 심각성은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에서 이루어진 외교안보통일정책을 사실상 전면부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대북정책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주의적 대북압박정책을 극단적으로 제도화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정권교체를 사실상 거부하는 반민주적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태도는 지금 당장의 한반도와 동북아정세만이 아니라 이후 남한 정부의 외교안보통일정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2027년 대선 이후 어떤 정부가 등장하든 간에 윤석열 정부가 만들어 놓은 후과를 감당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주 :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남북관계, 한중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굴욕적 한일관계 재정립, 한미일 군사협력의 제도화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은 동아시아판 나토 구축의 문을 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제도적 파급력이기 때문에 상상 이상으로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적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외적 변수들에 의해 미중 관계나 북미 관계, 북일 관계에 변화가 생길 경우에도 남한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2) 전통적인 해법들의 한계와 진정한 해법의 실현 불가능성
현재 상황이 심각한 것은 한반도와 동북아 국제정치 질서의 기본 틀이 재구축되는 과도기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현실주의적 대결 구도가 남·북·미·중 사이에 고착된다면 앞으로 상당 기간 한반도는 긴장과 불안, 공포의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는 여러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대응이 그런 시대적 상황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과 대결 분위기가 확대되는 것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의 무모한 정책에 제동을 걸고 새로운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5년 9.19 공동성명,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6.12 싱가포르 합의에서 확인된 모범답안은 더는 문제해결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에 따른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접근은 더는 현실의 해법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2019년 하노이 노딜이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북한과 미국의 태도가 바뀌기도 어렵지만, 바뀐 뒤에도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는 그런 현실을 바꿀 능력도 의지도 없다.
남한 보수세력과 미국이 강조하고 있는 북한 선비핵화론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왜냐면 30여 년에 걸친 북핵 협상의 진행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북한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항복을 요구하는데 북한이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물론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논리적 가능성만으로 본다면 여전히 해법은 존재한다. 그것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국의 핵우산체계 및 남한의 3축체계를 교환하는 전략적 협상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말이 부각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는 길이다. 아니 지금까지 핵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드 배치 배경과 논란에서 보듯이 미국의 핵우산은 단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북한만을 겨냥해서, 북한만을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남한 정부의 역할확대와 남북한 상호국가승인 방안
1) 갈등관리와 창의적인 해법의 필요성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적대적 갈등이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소위 평화학에서 말하는 ‘갈등관리’가 중요한 국면이라는 것이다.(주 : 평화학에서의 갈등관리는 당사자들 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제3자의 개입에 의한 노력을 포함한다. 남북, 북미 간의 갈등악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제3국이나 국제기구의 개입을 통한 관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황악화를 막는 노력이 중요하다.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돌과 전쟁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 함께 상황악화를 앞장서 이끌고 있다. 역설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강 대 강 대치를 미국과 일본이 조율하면서 악화를 방지하고 있다.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는 미국이나 북일협상 가능성을 흘리는 일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미국과 일본의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남한과 북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갈등관리체제가 구축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와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유엔사와 북한의 대화도 필요할 것이다. 군사적 대화만이 아니라 정치적 대화도 만들 필요가 있다. 남북한 간 핫라인이나 북미 간의 외교적 핫라인을 구축하는 것도 그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노력과 성과는 쉽게 폄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파할 수 있는 과감하고 창의적인 접근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접근법과 다르면서도 남한 정부의 독자적인 역할을 확대하고, 북한이나 미국, 중국, 일본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돌파구를 의미한다. 가장 매력적인 방안은 모두가 합의하는 일괄타결방안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과 미국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세계사적인 대격변이 벌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결국, 문제의 복잡성과 장기성을 인정하면서도 남한 주도로 문제를 해체하고 단순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북한과 미국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 제약과 역할한계를 갖고 있는 남한(주 : 남한의 위상과 역할은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 남한은 한반도전쟁질서의 당사자이며, 한미동맹의 구속을 받고 있으며, 세계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부정하거나 극복할 수는 없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길은 바로 남북한의 상호국가승인 방안이다. 그것은 적대적 갈등구조를 평화공존의 길로 전환해낼 수 있는 첫 단추, 즉 ‘상호존중’을 의미한다. 동시에 일본과 중국, 미국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연쇄적 변화의 동학(動學)을 갖고 있다. 생각해 보라. 남북한이 상대를 국가로 상호 승인하면서 특수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국제전인 한국전쟁의 핵심 당사자 간 적대관계가 전면적이지는 않더라도 청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연쇄효과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미 간의 핵협상과 외교관계 수립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길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남한 정부의 의지이고 능력이다.
2) 남한 정부의 역할 강화와 남북한 국가승인정책
가. 남북한 국가승인의 의미
최근 북한은 평화공존의 길이 아닌 적대적 분리의 가능성으로 별개의 두 국가를 기정사실화하는 문제를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주 : 윤영상, “북한이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이유” 『시민언론 민들레』 (2023.7.22.))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사실 남한은 1973년 6.23 선언 때부터 ‘남북한 교차승인’을 주장해 온 바 있다. 북한도 말로는 ‘하나의 조선’을 외쳤지만, 사실상 두 국가 현실을 인정하는 남조선혁명론과 통일방안을 제시해 왔다.(주 : 1961년 조선로동당 4차 대회에서의 김일성의 보고 연설, 1973년 발표된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등이 그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현 불가능한 방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남한 국민의 56.5% 이상이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국가의 평화공존을 지지하고 있고, 밀레니얼 세대(20대)의 경우는 71.4%에 이른다.(주 : 통일연구원, 『KINU 통일의식조사 2021』, pp. 6-7.) 문제는 공존이 아니라 적대이다.
남한의 보수세력들은 불리할 때는 두 개의 국가를 합법화하는 방안을 내세우다가 남한이 유리해지는 상황에서는 ‘하나의 국가’를 강조한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소위 민주평화진영에 속한다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남북한 상호승인이 영구분단의 합법화, 분단의 합법화를 의미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미 분단은 합법화되어 있다. 남북 공동수교국이 156개국이 넘고, 남북한 모두 유엔가입국이다. 국제법적으로 이미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남북관계는 한국과 조선의 관계(한-조 관계)라는 것이다. 단지 남한과 북한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영구분단 우려가 아니라 영구대결, 영구전쟁을 우려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되, 일반적인 두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두 국가 관계라는 새로운 ‘특수관계론’을 수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주 : 윤영상, “남북한 국가승인과 국가연합 - 공존형 통일방안의 실현가능성 모색,” 『통일정책연구』 제29권 2호, (통일연구원, 2020), pp. 66-67.)
나. 남북한 국가승인과 적대적 갈등의 평화적 전환
사실 남북한 국가승인이 저절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복잡한 전쟁질서와 동북아의 지정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9개국이 참여한 1954년 제네바회의나 1975년 미국의 키신저가 제안한 4자회담, 1997년 시작된 4자회담, 그리고 2003년부터 본격화되었던 6자회담 모두 전쟁질서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2018년의 남북, 북미 간의 정상회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 때문이었다. 북한의 셈법과 미국의 셈법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한과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남북한 상호국가승인은 적대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전환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상호존중’의 길을 열면서 동시에 복잡하고 구조화되어 있는 거대 쟁점을 다양한 수준의 하위 쟁점들로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마디로 남북한의 상호국가승인을 담은 남북한 기본조약이 체결되면 사실상 남북한 간의 평화조약의 필요성은 없어진다. 이제 한국전쟁의 질서는 북미 사이에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은 존재하지만, 점점 형해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엔사도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서부터 존립 근거를 위협받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북미 간 핵협상과 수교문제만 남는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존재 문제나 한미동맹의 문제는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와 상관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 국가승인문제가 그런 논의에 과거와는 다른 역동성을 부여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일괄타결이 어려운 상황에서 해결 가능한 요소들부터 해결하면서 평화체제 전환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축소해 나가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 맞게 남한 정부의 외교안보통일역량을 준비하고, 민간차원에서 보수·진보를 넘나드는 외교안보통일문제에 대한 숙의 협력의 장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3) 한반도 비핵화론은 여전히 중요하다.
만약 남북한의 상호승인논의가 활성화된다면 가장 먼저 북일수교교섭이 활성화될 것이다. 핵 군비경쟁, 압박과 제재가 지배하는 국면에서 상호승인과 수교를 둘러싼 협상 국면으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뒤이어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둘러싼 군비통제문제가 현실적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 국가승인이 평화공존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향에서 작동할 수 있다면 재래식 군비통제논의가 먼저 시작될 것이고, 핵 군비통제 논란이 가시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 비핵화 대안을 다시 현실의 쟁점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남한 정부가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북미 관계나 미·중 관계, 북·중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한 상호승인방안이 갖는 힘이다. 연쇄적인 변화의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선택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미·중 관계, 북미 관계를 고려한 ‘숙고의 시간’이 미국을 압박할 것이다. 남한은 한미동맹을 이용해 미국의 선택을 요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이 상황이 된다면 9.19 합의나 싱가포르 합의가 부활할 수도 있고, 하노이 노딜에서 배제되었던 스몰딜과 단계적 해법이 소환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를 지배하는 적대적 구조를 청산하는 과정이 현실화된다면 남·북·미·중 관계에서 상상을 초월한 대전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다자적 접근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라는 오랜 구상도 협상테이블에 다시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문제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다.
북한은 말로는 하나의 조선론을 외치면서도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론을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다 마친 상태이고, 법적·정치적 대응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게 되어 있다. 반면 남한은 하나의 국가론을 바탕으로 사실상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법적인 묘수를 찾아내든지, 아니면 헌법개정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주 : 현행헌법을 인정하면서 두 개의 국가론을 가능케 하려면 헌법 제3조 영토조항과 제4조 통일조항을 조화시키는 헌법재판소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존의 헌법재판소의 결정(1997.1.16. 89헌마240 결정)을 뒤집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 헌법개정을 통해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방식은 제3조의 영토조항을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합의는 필수불가결하다. 다시 말해 초당적 합의가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남한의 보수든, 진보든 두 국가체제 문제에 대해서 단일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남북관계가 교착상태거나 부담스러울 때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론으로 대응하다가도 남한의 우월한 지위를 강조하거나 흡수통일을 고려할 때는 특수관계론에 근거해서 하나의 국가론을 주장한다. 남한내부정치 상황과 관련해서도 두 입장이 오락가락한다. 문제는 민주당이나 평화진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두 개 국가론을 영구분단으로 간주하는 정서가 강고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남북연합과 같은 통일방안을 고려할 때는 두 국가 현실을 실질적으로 강조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정쟁의 문제로 몰고 가는 순간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남한의 보수와 진보는 서로가 서로에게 청개구리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정책과 주장에 대해서는 닥치고 반대부터 시작한다. 법 논리도 억지로 그렇게 꿰맞추는 것이 다반사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현실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평화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에 대한 국가승인 문제는 단지 북한을 승인하는 법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 내에 존재하는 적대적 질서와 문화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관계와 남남관계에서의 평화를 만들어내는 매개체가 바로 남북한 국가승인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외교안보통일문제에서 세부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당적 합의를 끌어내면서 평화공존의 길을 찾는 노력을 존중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의 통일헌장이나 문재인 정부 때의 통일협약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계속 이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윤석열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1) 평화운동 진영의 대응방식의 문제점
윤석열 정부의 현실주의적 접근방식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충돌위기를 가시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윤석열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한 대안적 노력을 가시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남한과 미국의 대응만이 문제가 아니라 북핵의 고도화 역시 심각한 문제의 한 축이라는 점을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퇴진이나 2027년 대선에서 정권을 되찾아 오는 것만을 기대하는 방식의 비판은 상황악화를 방지할 실질적 효과를 가지기 어렵다. 지금 당장 진행되고 있는 상황악화를 저지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할 때 더 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 재창출 외에는 답이 없다는 방식의 접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평화운동 진영의 보폭이 지나치게 양당정치에 종속될 경우, 그것은 민주당을 위해서든, 국민의힘을 위해서든, 대한민국을 위해서든 바람직하지 못하다.
2) 시민사회 차원의 공론장을 구축하고 초당적 협력을 촉구하는 길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정부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는 과감하고 창의적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한과 미국의 태도 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윤석열 정부를 압박하고 설득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평화운동 진영은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본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압박정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보수-진보 전문가들이 함께 대안을 모색하는 숙의의 장, 공론장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초당적 협력을 요구, 강제하는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북한승인 문제, 헌법개정방안 혹은 헌법개정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국가승인방안 등에 대해 진지한 법적 검토와 정치적 검토 등이 ‘숙의 의제’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와 남한과 미국의 핵우산을 ‘단계적 감축과 폐기’하는 핵군축회담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 설령 합의가 어렵더라도 충분한 토론과 검증을 바탕으로 남한 정부의 역할 강화방안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시도되었던 통일헌장이나 통일협약과 같은 노력도 충분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런 공론장을 살려낼 수 있다면 정치권을 변화시키고, 윤석열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함께 망하는 길이 아니라 함께 생존할 길을 찾아야 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참고 문헌]
- 『노동신문』. “위대한 우리 국가의 부강발전과 우리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자.” 2023.1.1.
- 윤영상. “남북한국가승인과 국가연합 – 공존형 통일방안의 실현가능성 모색.” 『통일정책연구』 제29권 2호 (2020).
- 윤영상. “북한이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이유.” 『시민언론 민들레』 (2023.7.22).
- 통일연구원. 『KINU 통일의식조사 2021』.
- 헌법재판소. 1997.1.16. 89헌마240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