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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민주주의와 정치

[장석준 칼럼] 다시 이념이 필요해진 시대의 이념, '생태사회주의'

'지구 자본주의'가 극한에 다다랐다
  • 입력 2021.04.28 11:00      조회 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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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가 끝나고 나서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의 실정에 대해 말들이 많다.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참으로 다양한 쟁점들이 이야기된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 논란도 있고, 이른바 '공정' 문제를 둘러싼 20대의 실망감도 자주 화제에 오른다. 교착 상태에 빠진 한반도 정세도 문제이고,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대응이 점점 혼선을 빚는 것도 불안감을 낳는다.

그러나 몇 십 년쯤 뒤에 후세대가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의 가장 커다란 실패가 무엇이었는지 따진다면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를 것은 지금까지 말한 쟁점들이 아닐 것이다. 기성 양대 정당 모두 부채질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청년 세대의 남녀 갈등도 아니고, 심지어는 부동산 가격 폭등이나 용두사미로 끝난 북핵 협상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후 위기 대응 실패일 것이다.

4월 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주도로 전 세계 40여 개국 정상이 참여한 기후 위기 대응 화상회의가 열렸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날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 정부가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상향하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2005년 수준보다 50% 이상 낮추겠다고 선언했고, 2030년까지 1990년 수준보다 55% 이상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겠다고 이미 합의한 유럽연합 회원국 정상들은 이를 환영했다.

다분히 선언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후 위기 대응의 세계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임에는 틀림없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하겠다는 막연한 목표 대신 앞으로 10년 안에 탄소 배출을 급감시키겠다는 보다 절박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대 변화를 확인한 이 자리에서 대세와 동떨어져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듯한 한 나라가 있었다. 대한민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은 2030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추가 상향해 올해 안에 UN에 제출하겠다"고 연설했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10년간 무엇을 할지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한 채 "올해 안에 마련하겠다"며 발언 시간을 채운 것이다. 누가 봐도 그저 변명이거나 미루기일 뿐이다. 이게 지금 곳곳에 "K-" 접두어를 붙이며 "글로벌 선두"를 부르짖는 나라가 인류의 생존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이다.

기후 위기 대응 실패, 집권 리버럴 세력만의 탓인가

주요국 정부들이 30년 뒤의 '천년왕국'만을 되뇌던 수준을 벗어나 이렇게 탄소 배출 감축을 당면 과제로 바라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후 위기 자체의 급진전에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 대유행의 해였을 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들어선 것 아닌가 하는 대중적 의심을 불러일으킨 해이기도 했다. 여름철 시베리아의 이상 고온, 유럽의 기록적 폭염, 지구 곳곳의 삼림을 덮친 대화재, 미국 텍사스의 이상 한파가 모두 몇 달 사이에 몰려 왔다.

기후 '위기'가 아니라 이제 가시적인 기후 '재난'을 말해야 하게 된 상황에서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의 가속화를 가로막은 장애물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였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시끄러웠던 미국 대선을 통해 이 장애물이 치워졌다. 그러자 뒤늦게나마 봇물 터지듯 각국이 기후 위기 대응의 고삐를 바짝 죄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만은 여전히 예외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집권 세력의 차이? 그렇게 보기에는 현재 주요국 정부의 이념과 노선에 큰 차이가 없다. 미국 민주당을 비롯해 거의 모든 집권당이 리버럴이나 기독교민주주의에 속한 '중도우파' 성향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도 리버벌이고 중도우파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다른 중도우파 집권세력들에 비해서도 기후 위기 대응에 소극적이며, 차라리 보이콧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실은 리버럴 세력 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리버럴 세력의 핵심 가치는 자본주의 질서를 지속하고 그 끊임없는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물론 보다 보수 쪽에 기운 우파와는 달리 계급 타협을 중시하며 이를 위해 부분적 개혁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와 성장 방향을 지속시킨다는 전제를 넘어설 수 없다. 미국 민주당도 그렇고,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도 그러하며, 한국의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지금 인류가 기후 위기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막는 결정적인 정치적 족쇄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모든 생태계 위기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에 역행하거나 이를 넘어서는 사회적 선택과 결정들을 지속하지 않고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그런데 가장 반동적이거나 수구적인 우파뿐만 아니라 중도우파까지(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같은 중도좌파도) 자본주의의 구조와 관성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아니, 이를 지키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러니 기후 위기에 대한 과감한 대응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수밖에 없다.

중도우파의 속성이 그렇다면, 기후 위기 대응 화상회의에서 보인 여러 정부의 입장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각국 정부의 탄소 배출 감축 목표 상향이 겉으로 보기보다 그리 전향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30년"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거대한 계획들과 그에 걸맞는 투자에 벌써 착수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 등에서는 피상적인 수준에서나 변화가 감지되는 데 반해 한국은 요지부동이다. 비슷한 리버럴 성향 정부인데도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집권세력에게 있지 않다.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관성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다른 힘이 있다. 집권세력 바깥에서 형성된 그 힘이 기후 위기-재난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집권세력에 커다란 압력을 넣고 있고, 그래서 중도우파 정부들도 과거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대통령 선거 도전을 계기로 대중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린 뉴딜'을 주창하며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 주류를 압박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한때 노동당 당권을 쥐었던 당 내 좌파가 '녹색 산업혁명'을 내걸자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 총리가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상향하며 응수했다. '그린 뉴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는 오래 전부터 녹색당과 급진좌파가 생태 전환을 외쳐왔다.

이것이 최근 각국 정부의 태도 변화 이면에서 작동하는 정치 동학이다. 단지 기후 재난이 가속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인간과 사회의 언어로 옮겨 대전환을 역설하는 사회-정치 세력이 성장하고 있고 이들의 활동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기존 자본주의 원칙 및 현실과 충돌하더라도 기후 위기에 당장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는 각성이 조금씩 늘고 있다. 집권세력은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4월 22일 화상회의의 장면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만 비판할 일이 아니다. 한국의 리버럴이 특별히 아둔하고 무능한 리버럴이기도 하겠지만, 한국 사회의 기후 위기 대응을 정체시키는 더 중요한 요인은 자본주의 너머를 내다보며 즉각적인 생태 전환을 다그치는 사회-정치 세력의 부재다. 미국의 '그린 뉴딜' 운동이나 유럽의 녹색당-급진좌파 같은 세력의 공백이다. 마땅히 이 공백을 채워야 할 정당과 사회운동이 그 역할을 못하는 탓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어쩌면 더 큰 책임은 (애초에 기대를 걸만한 대상이 아닌 리버럴 집권자들이 아니라) '좌파'에게 있을지 모른다.

다시 이념이 필요해진 시대의 이념, '생태사회주의'

언제부터인가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상식이 됐다.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워낙에 그런 선전이 맹렬히 전개되기도 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 대다수가 이에 동의하기도 했다.

이념이란 인간 사회가 늘 가던 길에서 벗어나 새 길을 만들어가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을 때에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정표를 찾을 수 없거나 그게 더는 도움을 못 줄 때에만 밤하늘의 별은 우리의 인도자가 된다. 지난 세기의 프롤레타리아나 식민지 민중에게는 그런 별이 정말로 필요했었나 보다. 그리하여 그토록 치열하게 이념의 시대를 살아야 했었나 보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길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지구자본주의가 그 운명을 극한까지 펼쳐내는 것 외에 다른 길이란 없었다. 물론 그 길 위에서 결실을 새롭게 나누거나 규칙을 조금 고치자는 제안이나 이견은 있었다. 보다 인간적인 리버럴이나 가장 온건한 사회민주주의가 이에 해당했다. 또한 그래서 이들은 '이념'이라 불리기에는 어색한 흐름들이었다.

한데 지구 생태계가 갑자기 지구자본주의의 운명의 그 '극한'이 바로 지금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들 유일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길이 발밑에서 무너지고 있다. 인류는 갑자기 다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봐야 할 처지가 돼버렸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았는데, 시장 아닌 다른 방식의 교류와 선택, 공동행동에도 익숙해져야만 생존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역사상 유례없이 부유층과 상위 중산층에게 부와 권한이 쌓여왔는데, 노동 대중에게 전례 없는 결정권이 주어져야만 사회 전체가 지속될 수 있게 됐다. 2008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더욱 막대한 자금이 자산시장에서 넘실대는데, 사회의 자원과 에너지를 미지의 영역에 대거 투입해야 문명의 붕괴를 막을 수 있게 됐다.

너무도 급박하고 급진적인 전환의 요청이다. 그렇기에 인류에게는 다시 이념이 필요하게 됐다. 지구자본주의의 궤적과는 다른 길을 가리키는 단서와 노력, 이야기들의 보따리가 필요하게 됐다. 그 이념은 자본주의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이를 자유롭게 넘어서는 이성과 정서, 상상력을 북돋워 생태계 위기에 대응할 인간과 사회의 잠재력을 최대한 현실로 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이념을 간명히 부를 보편적 명칭으로 '생태사회주의' 말고 다른 무엇을 떠올리기 힘들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 세력과 리버럴 세력뿐만 아니라 진보좌파도 위기라고 한다. 촛불 항쟁의 위임자라며 감히 '진보'라 자처하던 리버럴 정부가 실패한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좌파가 그런 대안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대안의 방향은 분명하다. 단지 한국의 좌파가 이 분명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을 뿐이다. 그 방향이란 탈자본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다시 실천 무대에 올림으로써 지구 생태계 위기와 거대한 불평등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노력, 생태사회주의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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